우리나라는 예전에 지번제를 사용했었습니다. 그런데 운영상 부적절함이 있었습니다. 그게 마치 지번제의 부적절성인 양 변질되어서 도로명제로 바꾸는 핑계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말이죠, 도로명제도 치명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도로명제는 아는 사람이 아니면 찾기 힘들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어떤 외국 소설에 등장하는 지역신문 기자가 화재발생의 연관성을 찾다가 문득 지도를 보고 나서야 깨닫습니다. 같은 지역에서 발생한 것이라는 걸. 왜냐하면 한 블록에서 여러 건이 발생했지만 모두 다른 가로명에서 발생했거든요. 어떤 블럭의 동서남북에 지나가는 도로는 제각기 다른 이름입니다. 중간의 작은 도로도 마찬가지죠. 아는 사람만 거기가 어딘지 알 수 있는 게 가로명제입니다. 반대로 전혀 모르는 사람도 알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일단 길(과 그 시작점)을 찾을 수 있다면 말이지요.


지번제는 크게 두 가지로 운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예전에 우리나라에서 했던 것처럼 행정편의를 위하여 특정 지역에 지어지는 건물을 짓는 순서대로 번호를 붙이는 것입니다. 왜 행정편의라고 하느냐면, 특정 지역에 건물을 백 채쯤 지을 수 있다고 합시다. 건축물대장에 올려야 하죠? 빈 칸을 두면 안되니까 순서대로 번호를 부여하게 됩니다. 즉, 짓는 순서가 번호가 됩니다. 그러니 1호 옆에 14호가 있거나 99호가 있습니다. 이것은 불편합니다. 그래서 철폐해야 했습니다.


예, 그런데요, 지번제에는 두 번째 운영방식이 있습니다. 격자를 댄 다음 미리 지번을 부여해 두는 방식입니다. 통일된 원칙(대체로 좌에서 우로 쓰니까 왼쪽 위를 1번, 오른쪽 아래를 마지막 번호를 한다는 정도랑 몇 미터 간격으로 격자를 만들 것인가?)을 하나만 만들면, 전국에 번호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단일체제라면 숫자가 지나치게 길어지고, 또 전통적인 지명도 활용해야 하니 일정 행정단위별로 번호를 부여하면 됩니다.


이 제도를 도입하면 누구나 (정말로 누구나) 특정 장소의 특정 지번을 단숨에 찾을 수 있습니다. 해당 구역중 격자의 가장 빠른 서북 모퉁이에 걸리는 번호를 부여하면 되거든요. 도로명 제도에서는 길의 수만큼 이름을 만들어야 하지만 격자 지번제에서는 동네 이름하고 지번만 필요합니다. 물론 이 제도하에서도 다른 동이라면 (길 건너) 바로 옆집이지만 전혀 다른 이름이 붙습니다만 동네 이름 정도는 대충 기억할 수 있으니 지금의 도로명보다는 혼란이 덜할 것입니다. 남부순환로 22번지는 어디에 있습니까? 400번지는요? 두 지점 은 대략 4키로미터가 떨어져 있습니다.(홀짝에 20미터 간격이니 3780미터가 정확하겠지만)


격자 지번제에서는 (예를 들어 천 단위 이상은 남북으로, 백 단위 이하는 동서에, 또 간격은 10미터마다 부여한다고 가정한다면) 봉개동 2034번지와 3055번지는 남북으로 10미터, 동서로는 210미터 떨어진 곳입니다. 더 엄밀하게 말하자면 3055번지는 2034번지에서 동쪽으로 210미터, 남쪽으로 10미터 떨어진 집이라는 뜻이지요.


텅 빈 그린벨트 내에서도 뚝 뚝 떨어져서 지어지는 건물에 항구불변의 지번을 부여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Posted by SMH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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