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년에 레지던트를 시작한 다음 학회에 내려갈 일이 생겼습니다. 1년차이니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됩니다. 어디로 오라면 오고, 뭘 하라고 하면 하면 되지요.


학회가 끝나고 서울로 돌아올 때 3년차 선생님의 차로 이동하게 되었습니다. 당시에 학회에 참석한 사람이 레지던트는 5 이상이었을 겁니다. 그 중 다섯 명이 한 차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운전자는 소유주인 3년차, 2년차 셋은 다 여자였고 앞자리와 뒷자리 앙쪽을 차지해서 제가 가운데에 앉았습니다. 네 명의 여자와 한 명의 남자. 전체적인 사이는 줄곧(그때부터 지금까지) 나쁘지 않았기 때문에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나누며 가게 됩니다.


차종은 소나타. 며칠 전에 쓴 글에 등장하는 그 차입니다. 당시 이 선생님은 독신이셨는데 덜컥 소나타를 사신 것입니다. 전에 이야기한 것처럼 당시엔 급에 따라 자동차도 급이 매겨진 것 같은 분위기가 대세였습니다. 물론, 공론적은 아니고 사적인 자리에서 말이지요. 이게 더 무서운 게 다른 발로 하면 뒷말이 많다는 뜻이니까요.


하지만 모든 충격은 시간이 해결해 준다는 원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건이 되었고, 다른 교수님들이 차의 급수를 높이면서 훗날 해결되었습니다.


아무튼 아직 신차인 셈인데(천 킬로미터도 안 달렸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서울에서 광주(내지 전주)로 내려 갔다가 다시 올라오게 되었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오히려 잘된 일이라고 봅니다. 제한속도를 지킨다면 안정적이며 (상대적) 고속으로 정속 주행을 하는 것이니 엔진 길들이기 측면에선 좋다는 말씀입니다.


이 차는 스텔라에 몇 가지만 바꾼 모델이 아니라 일본에서 부품을 수입하여 조립만 한 모델이라는 말을 당시에 들었던 것 같습니다. 스텔라처럼 펜더 부분이 밋밋한 게 아니고 불쑥 튀어 나온 모델. 제 기억에는 남아 있는데, 인터넷의 위키 같은 곳에는 안 보이네요.


창문을 닫으니 시속 100킬로미터로 달리는 데도 조용하더군요. 바람 소리도 없고, 엔진 소리도 없고, 바퀴 소리는 적고. 게다가 크루즈 기능이 있어서 한적한 곳에서는 버튼만 누르면 핸들에만 신경을 써도 되고. 덕분에 대전쯤부터는 모두 졸았습니다. 운전자만 힘들었겠지요. 탑승한 1-2년차들는 졸고 있고, 3년차만 혼자 묵묵히 운전을 하다가 수원 근처에서 밀리는 와중에 깼습니다. 나중에 제가 차를 몰아보니까 옆에서 자면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나도 졸리게 되고, 신경이 둔해지면 사고가 날 가능성이 높아지니까요.


다른 이야기인데 바람 소리가 안 나니까 다들 얼마까지 올리면 날까가 궁금해져서 운전자를 충동질했습니다. 140을 넘기니까 (초보에게 140을 주문한 게 지금 생각해 보면 꽤 위험한 것인데, 한가한 고속도로라서 괜찮았던 것 같습니다.)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더군요. 물론, 그 다음에는 안전 운행을 위하여 100으로 내렸습니다.(그 때 제한 속도가 얼마인지 기억이 안 나서 100이라고 적었을 뿐입니다.)


토요일인 데도, 그리고 차로가 지금보다 적었는 데도 한가했던 것이 아직도 기억 납니다. 차 한 대를 지목해서 뒤만 따라 가니까 이상했는지 갑자기 속도를 늦춰서 우리를 앞세우더군요. 그 차를 따라간 이유는 노부부를 모시는 운전사가 딸린 차처럼 보여서 안정적으로 운전하리라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아직 우리 운전자가 초보를 벗어나지 못한 상황이니까요.


그래서 소나타에 대한 인식이 아주 좋아졌습니다. 아니, 좋아졌다는 말은 어폐가 있겠습니다. 제가 차를 아직 많이 겪어 보지 못했고, 선입견도 별로 없었던 시절이었으니까요. 다른 분들의 소나타에 대한 인식이 그 때 조금 달라진 것 같았습니다.


 * * * *


하지만 다른 교수님 한 분은 (원래 차가 무엇이었는지는 잊었지만) 르망을 구입하셨습니다. 그 땐 시동을 걸고 나서 조금 있다가(대체로 1-2분) 출발하는 게 보통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차에 타게 되었는데 곧장 출발하시더군요. 제가 그 이야기를 했더니 아, 이 차는 그냥 가도 되는 거야. 라고 답했던 게 기억 납니다. 그 이후의 차들은 모두 그랬을 것 같은데 5-6년 뒤 제가 차를 구입한 94년만 해도 시동후 예열 후 출발하라는 게 자동차 설명서에 적혀 있었으니 모든 차가 다 그랬던 건 아닌가 봅니다.


르망은 차 크기에 비해 내부가 좁아 보였습니다. 이미 언급했던 스텔라나 소나타랑 비교하면요. 포니보다는 넓었지만. 그래도 괜찮아 보인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사자도 만족해 하고.


두 번째 르망은 군대에 가서 만났습니다. 같은 부대의 치과 군의관이 르망을 몰고 다녔습니다. 대위 군의관이 다섯이었는데 넷은 여단 소속이고, 저는 같은 영내의 대대 소속이었지만 우리에겐 별다른 차별이 없으니 같이 다닌 경우가 꽤 되었습니다. 그래서 여러 번 타게 되었고, 역시 당사자는 만족해 하더군요. 그리고 재미있게도 이번에는 차가 교수님의 차보다는 넓어 보였습니다. 아마도 윗사람인가 동등한 사람인가에 따라 달라지는 감정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다른 군의관의 차는 다른 글에서 언급하겠습니다.

Posted by SMH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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