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용어란 특정 영역에서 주로 사용되는 압축된 뜻을 가진 단어를 말합니다. 실생활에서 자주 접하는 것으로는 의학용어라든가 법률용어 등이 있겠습니다. 의학용어는 몇 차례에 걸쳐 쉽게 만든다고 하면서 마구 헤집어 놓았습니다. 문제는 기존에 배운 사람들이 새로운 용어를 배울 기회가 많지 않다는 것과 너무 자주 바뀐 것들도 있어 시기마다 다른 용어를 배운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전문용어는 특정 집단 내에서 주로 통용되는 단어이기 때문에 굳이 일반인을 고려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 전문가들이 일반을 상대할 때에는 당연히 풀어서 설명해야 하지요.


그런데 전문용어랑 일반인을 상대로 설명할 때 사용하는 단어를 헷갈리는 일부 사람들이 전문용어의 한글화 내지 쉬운 용어화를 주장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전문용어는 일반인과는 무관한 단어들입니다. 예전의 영한사전을 들춰서 확인했을 때 <혈관>을 뜻하는 <vessel>이란 단어에서 <혈관>이란 뜻은 열다섯 개의 뜻 중 열한 번째에 있었습니다. 영영사전에서는 가지수는 달랐지만 역시 뒤쪽에 나왔고요. 일반인들이 vessel을 쓸 때 혈관이란 뜻보다는 다른 뜻으로 더 많이 사용한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의사들에게는 혈관이란 뜻으로 먼저 다가옵니다.


잘못된 것은 전문용어를 환자(그러니까 비전문이자 일반인)에게 여과없이 사용하는 사람(의사나 의료 관계 인력)에게 있는 것이지 전문용어 자체에 있는 게 아닌데, 둘을 혼동한 나머지 용어 자체를 바꾸려고 노력하는 웃지 못할 비극이 발생하는 것이지요.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전문용어는 전문가 집단 내에서 압축된 뜻을 전달할 때 사용됩니다. 그런데 서로 다른 용어를 짧은 기간 내에 배운다면 어찌 대화가 되겠습니까?


이럴 경우 기득권 때문에 후배 세대는 앞의 단어들을 모두 익혀야 합니다. 따라서, 전문용어에 손을 대고 싶다면 한 세대 동안은 다시 손을 대지 말아야 하는데, 몇 년이 지나 개정판이 나올 때마다 바뀐 용어도 있더군요. 5차 개정판 때까지 몇 단어를 추적해 봤는데, 용어가 4개(기존 단어와 세 번 바뀜)나 되는 단어도 있었습니다. 이쯤 되면 순수한 목적으로 용어개정작업을 한다고 바라볼 수 없습니다. 게다가 이 추진 세력의 대부분이 비임상의라는 것도 당시에 문제로 지적된 바 있습니다.


자주 바뀌는 것은 전문용어로써의 기능을 하지 못합니다. 10년 뒤에는 다른 단어를 사용해야 한다면 얼마나 많은 정열의 낭비입니까? 최신 지식을 익혀야 할 사람이 다른 전문가 그룹과 대화하기 위해 새로운 단어를 외우고 있어야겠습니까? 이렇게 보면 전문용어에 외국어를 사용하는 것도 나쁜 선택이 아닙니다. 자기들끼리 뜻만 통한다면 그게 외국어든 자국어든 무슨 상관입니까? 뜻이 잘 통하는 단어가 중요한 것이지 어느 언어를 사용하느냐는 부차적인 것이라고 봅니다.


다만 일반인을 상대할 때에는 알아들을 수 있는 뜻으로 풀어서 설명해야지요. 자동차에서 쇼바라는 게 있지요. 쇽 옵저버인데 일본 사람들이 발음이 안되니 쇼바라고 줄여서 쓰는 것이지요. 자, 이 단어를 자동차 정비사들끼리 사용하는 것을 뭐라고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일반인을 상대로 할 때에는 <완충기라고 하는데 충격을 완화시켜 주는 장치이다.> 라고 말해주면 됩니다. 의사들끼리 베셀(베설-베슬 중간음이 더 정확한 발음이겠지만 아무튼)이라고 말하더라도 환자에겐 혈관이라고 말해주면 문제가 될 게 없지요. 그리고 혈관을 꼭 핏줄로 바꿔야만 하는 건 아니거든요. 누구나 아는 단어는 그냥 써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굴염>이라는 게 있습니다. 옛날에 부비동염(paranasal sinusitis)이라고 했던 것을 지금은 코옆굴염이라고 하지요. 일반인은 축농증으로 알고 있는 질환입니다. 어차피 일반인에게는 굴염이라고 해봐야 무슨 뜻인지 모릅니다. 축농증이라고 말하면 들은 풍월이 있기 때문에 아, 하고 아는 척하게 되지요. 부/비/동을 한글로 바꾼 다음 염증은 한글에 없으니 그냥 염이라고 붙인 이중국적의 단어입니다. 바꾸기 위한 바꿈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전문용어의 주대상층은 일반인이 아니라 해당 전문가 집단입니다. 전문용어는 한번만 배우면 죽을 때까지 사용 가능하거든요.(또한 그게 가능해야 하고요.) 어원이라든가 무슨 단어인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느닷없이 바꾸는 것은 기존 전문가들을 (그 단어에 대해) 무식하게 만드는 것과 전문가 집단의 선후세대간의 대화 단절을 불러옵니다. 다시 말하지만 바꾸고 싶다면 수십 년의 간격을 두고 바꿔야 하고요. 10년도 안되는 기간에 바꿔서는 안된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의학용어를 보면 잘못 (알고) 명명된 단어가 적지않게 발견됩니다. 하지만 제대로 배운 의사라면 진짜 뜻을 모두 알기에 그냥 씁니다. 수십 수백 년 전의 기록과 일관성을 유지하려고요. '이 단어는 일반적으로는 저런 뜻이지만 이 분야에서는 그런 뜻이다.'라고 한번만 배우면 평생 써먹을 수 있는데, '야, 뜻과 다른 용어네, 바꾸자.' 하면 바뀌기 전후의 사람 모두에게 불편만 끼칠 뿐입니다.


명분 좋아하다가 나라 말아먹은 조상들에게서 배운 게 없나요? 현장에서는 명분보다 실리가 더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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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MH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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