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 대학교 의과대학에서 교수회의가 열렸습니다. 백여 명의 교수 중 다수가 참석하였으니 정상적입니다.

한 명이 사회를 맡은 학장에게 질문을 하였습니다. 모 교수가 퇴직하였는데 왜 후임을 안 뽑습니까?

학장이 답변합니다. 총장이(물론 총장님이라고 했겠습니다만 여기서는 존칭을 생략합니다.) 의과대학은 학생 수가 적은데 왜 교수가 많냐면서 배정을 안해 줬습니다. 지금 항의하고 협의중입니다.

참석자들은 다들 총장이 무식하다고 화를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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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보기에 그 총장은 무식합니다. 우스개 소리로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하지요? 그리고 용감합니다.

의과대학 인증평가 사업이라는 게 있습니다. 통과 못하면, 미인증이 되고 부실 대학이 됩니다. 서남의대를 제외하곤 미인증은 없었습니다. 다들 열심히 노력한 결과지 기준이 느슨해서가 아닙니다. 아무튼, 거기에 이런 조건이 있습니다. 교수의 숫자에 대한 것인데, <기초의학은 전임교수가 25명 이상>, <임상의학은 20개 이상 전공 분야에 전임교수가 85명 이상>, 그 외에 <의학교육 담당 교수가 전임 또는 겸임(겸임시 의학교육에 80% 이상 투입할 경우만 인정)으로 있어야> 하고, <의료인문학에 1명 이상이 (전임으로는 1인, 전담으로는 3인) 있어야 한다>. 이 숫자를 단순하게 합산하면 112명 이상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기초의학은 대학별로 달라서 8-12개 교실로 나눠져 있고, 임상의학은 전문의 과목이 26개인데 기초에 속한 2을(병리학과 예방의학) 빼면 24개 전문의 과목이라서 2정도(결핵과와 산업의학과)를 추가로 빼고 대체로 포함됩니다. 그래서 보통은 125명 내외가 됩니다. 이게 최소 숫자입니다. (이 많은 숫자를 대학 월급만으로는 보전할 수 없으니 대학병원이 필수가 되고 겸직을 시켜 급여의 상당 부분을 병원에서 충당시킵니다. 숫자가 더 많은 곳은 병원에서 일하는 겸직 교수가 많아서 생기는 착시효과입니다.)

같은 교육자이지만 총장은 이러한 세세한 숫자와 현실을 모르니 '의과대학은 교수가 많으니 교수 정원 하나쯤 줄여도 되는 것 아냐?'라고 생각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일이 우리나라에선 보건복지부에서도 일어납니다. 일반 국민들이야 어떻게 시스템이 돌아가는지 모르니 선동꾼이 선동하는 것이 달콤하고 맞는 것처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전문 분야에서는 일반인의 의견은 무시할 만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자기 결정권은 보장해야 하지만요. 정책에 대한 의견은 무시하는 게 옳다고 생각합니다. 의견만 청취하고 반영 여부는 전문가가 독립적으로 결정해야 한다고 봅니다.

보건복지부는 24년도 기준 656조의 예산 중 무려 122조가 배정되어 있습니다. 대부분은 복지 쪽이고 의료는 적을 겁니다. 예산안을 확인하니 일반 행정과 복지가 115조네요. 예산과 마찬가지로 인력도 의료 쪽은 적을 겁니다. 현업에 있을 때 학회에서 종종 들은 이야기가 뭐냐면 보험이사의 주임무가 담당 사무관이 바뀌면 쫓아다니면서 우리의 실상에 대해 설명하는 것이라고 하더군요. 반년쯤 지나면 아, 병리는 다르네요? 라는 답이 나오는데, 문제는 1년 반이면 대체로 이동하니까 조만간 새로운 사무관에게 처음부터 또 설명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 중에는 이해력이 부족한 사람이 있기 마련이고, 그럴 경우 이상한 정책이 실행됩니다. 다음 사무관을 설득할 때까진 찬바람이 부는 것이죠. 즉, 보건복지부의 의료 담당 공무원도 세부 항목에 들어가면 비전문적이란 말입니다.

전에 학회에서 보건복지부 사무관이 특강을 한 적이 있었는데, 의료 쪽은 법령이 커버하는 분야가 미미하다고 하더군요. 절대다수는 법, 시행령, 시행규칙도 아닌 보건복지부 고시에 의거하여 시행된다고. 그러니까 코걸이 귀걸이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입니다. 심사평가원에서 전횡을 하는 이유도 알 것 같지 않습니까?

각설하고, 비전문가들이 정치적인 판단을 하면 전문가는 (합리적인 이유로) 반대를 하여서 (국민과 정치인들에게) 욕을 얻어먹고, 국민들은 그 폐해를 정책이 현실화된 다음에야 몸으로 느끼게 됩니다. 그 사이에 국민들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 정치인을 이런저런 이유로 지지하고요. 나중에는 해당 전문가 집단에게 일을 제대로 못한다고 다시 욕을 하는 것도 덤입니다. 진정한 시민(국민과 시민은 다르다는 거, 아시죠?)이라면 나름 합리적인 추론을 통해 정치인을 비판하겠지만 현안이 너무 방대하면 전문가가 아닌 시민은 찾기 힘들어지기 때문에 도매로 전문가랑 함께 욕을 먹겠습니다.

==== 추가

기초의학 교실명

해부학, (조직학), 생리학, 약리학, 생화학, 미생물학, 기생충학, 예방의학, 병리학은 전국 의대에서 공통입니다. 조직학은 해부학과 합친 경우가 꽤 되어서 괄호 처리했습니다.

그외 (가나다순) 면역학,  법의학, 분자세포생물학,  분자의학, 사회의학, 열대생명학, 의과학, 의료정보학, 의생명학, 의용공학, 의학교육학, 인문사회학, 정보의학 등등 다양한 이름의 교실이 있는데 보시다시피 이름만 다른 게 상당하므로 대체로 많아야 12개 정도입니다.

임상의학 교실명

내과학, 외과학, 산부인과학, 소아과학(소아청소년과학)이 이른바 <내외산소>라고 부르는 기본과입니다. 내과는 8개인가의 분과(감염, 내분비, 류마치스(알레르기), 소화기, 순환기, 신장학, 혈액종양, 호흡기)로 나눠져 있는데 사실상 서로의 분야를 잘 모르니 별개의 과로 보아도 무방합니다. 산부인과는 아시다시 산과학과 부인과학의 합체입니다. 물론 대학병원에선 서로 기능이 분리되어 있습니다.

그 외 (가나다순으로) 가정의학, 결핵과, 마취과학(아마도 마취통증의학과), 방사선학(영상의학), 방사선종양학, 비뇨기과학, 산업의학(직업환경의학), 성형외과학, 신경과학, 신경외과학, 안과학, 영상의학, 응급의학, 이비인후과학, 임상병리학(진단검사의학), 재활의학, 정신과학, 정형외과학, 피부과학, 핵의학 등이 있습니다.

부차적으로 치과학이 있을 수 있습니다만 이는 치과대학에 별도로 설립됩니다. 아마 교정, 구강악안면외과, 보존, 보철, 치주 등이 있는 것 같은데 제 분야가 아니라서.

왜 의과대학에 교수가 많이 필요한지 아시겠죠? 내과도 분과별로 또 세분화되어 있어 한 분과 내에 적어도 4-5명이 필요하기도 합니다. 의학과는 법적으로는 하나의 학과이지만, 학문 영역으로 보면 적어도 30개, 많으면 50개 또는 그 이상의 분야로 쪼개집니다. 의대 교수들도 자신들의 실체를 잘 모를 정도이니 다른 대학이나 더 나아가 문외한들은 오죽하겠습니까?

Posted by SMH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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