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은행 1만개인데…한국은 왜 ‘5대’만 고집하나?

[김기훈의 경제TalkTalk] 서정의 한국은행 국장 ①/③

입력 2023.03.13. 13:03업데이트 2023.03.13. 13:53
 
 
한국은행 서정의 국장은 오랫동안 한국과 세계의 금융제도에 관해 연구한 사람이다. 그가 5년전에 쓴 책의 제목은 ‘대한민국 금융빅뱅 시나리오’였다. 책의 목차를 열어 보니, 현재의 은행 고금리 이슈를 연상시키는 제목이 눈에 확 들어왔다.

‘제 1부, 무엇이 문제인가?…예대금리차’

‘제 2부, 왜 이런 문제가 생겼을까?…은행 과점…은행 수익성의 진실게임’

책에 있는 수많은 표와 그래프들의 숫자가 현재와 시차가 있지만, 한국의 금융제도에 대한 통찰력은 살아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만나 보기로 했다. 따사로운 봄 햇살과 차가운 겨울 바람이 교차하던 지난 3월 2일 오후 2시, 필자는 서울 중구 남대문로 55 한국은행 소공별관 13층 제1 세미나실에서 서 국장과 마주 앉았다.

—한은 입행 이후 주로 어떤 업무를 담당했나?

“입행 직후에는 조사제1부 금융제도과에서 우리나라 금융제도 전반에 관한 일을 다 했다. 한은법에 보면 정부에서 중요한 금융 관련 법률을 제개정 할 때에는 관계 기관이 한은 금융통화위원회에 자문해 답신을 얻어야 한다는 규정이 있다. 금통위에 자문이 오면 답신을 만들어 정부에 보내는 일을 많이 했다.

또 한국의 금융산업 현황과 발전 방안에 대한 분석 보고서도 많이 썼다. 미국에서 공부한 뒤에 벨기에 EU(유럽연합)대표부에 파견을 간 적이 있다. 그 때 얻었던 현장 경험과 인맥이 한국의 금융산업을 되돌아보고 개선 방안을 찾는데 큰 도움이 됐다.”

32년간 금융제도 연구

—지금 하고 있는 일은?

“연구조정역을 맡고 있다. 한국은행에서는 여러가지 연구를 많이 하는데, 연구자들이 쓴 보고서를 보고 개선점을 찾는 일을 한다.”

—금융제도를 연구한지는 얼마나 됐나?

“32년 전 한국은행 입행 이후에 줄곧 그러한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연구를 해왔다.”

—금융제도를 독자들에게 쉽게 설명하면?

“금융제도는 금융시장, 금융기관, 금융규제로 구분된다. 이 3가지를 묶어서 금융제도라고 한다. 이 중 금융기관은 그룹 단위로 은행, 증권사, 보험회사 형태로 연구한다. 따라서 금융기관 대신 금융산업으로 볼 수도 있다.”

서 국장은 독자들이 최대한 알기 쉽게 설명하려고 노력했으나, 독자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단어들이 흘러나왔다. 그래서 독자들의 피부에 와닿도록 현재 이슈가 되는 은행 금리 문제에 대한 질문으로 바로 들어갔다.

‘은행 과점 폐혜’ 공론화

—현재 정부가 논의하고 있는 은행의 예대(예금과 대출)금리차 축소와 은행 산업의 개편 방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대통령이 한마디 하자 금융계가 움직이고 있다. 지금이라도 이러한 문제가 공론화되어 참으로 다행이다. 최소한 이제는 우리나라 은행 산업이 과점이라는 사실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는 점만 해도 성과이다.”

—그 정도로 은행 과점에 대한 논의가 없었나?

“은행 산업의 과점화가 어떤 폐해를 갖고 오는지에 대해 수십년 동안 논의가 없었다. 아예 은행 과점은 당연한 것 같이 여기고 살아왔다. 오히려 관변 연구단체 중심으로 우리나라 은행 산업은 내부적으로 경쟁이 충분하다는 식의 보고서가 심심찮게 나오고 있었다. 말도 안되는 행태였다. 은행 산업을 과점으로 인식하고 문제를 제기하는 움직임이 사실상 전혀 없었다.”

만족스럽지 못한 개혁 방안

—지금 나오는 개혁 방안은 만족스러운가?

“지금까지 언론을 통해 알려진 내용을 보면 기대보다 걱정이 앞선다. 예를 들면, 인터넷 은행을 더 만들어야 하다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이는 진실을 왜곡하고 지엽 말단적인 이야기이다. 핀테크 기업을 대상으로 은행의 지급결제 업무를 허용해야 한다든지, 은행의 업무를 여러 개로 나눠서 다른 금융회사들이 그 중의 일부를 취급할 수 있도록 스몰 라이선스(small licence)를 시행한다든지, 다른 은행들에게 자극을 주는 챌린지 은행을 허가해야 한다는 등의 논의도 있는 것으로 들었다.

왜 이런 이야기들이 나오는 것인지 이해가 안된다. 핵심적인 이야기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엉뚱한 이야기들이다. 전반적으로 배가 산으로 가는 것 아닌가 걱정이다.”

서 국장이 예리하고 비판적인 발언을 이어갔다.

“어려울수록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동안 금융산업에서는 뭐가 터지면 땜빵식으로 처리해왔다. 대통령이 걱정할 정도로 우리 은행산업이 문제라면 지금이라도 무엇이 문제인지 진지하게 논의해야 한다. 사안이 우리 국민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는 중차대한 문제인 만큼 일개 정부 부처에만 맡겨서는 안된다. 국회가 나서야 한다.”

매년 GDP 2% 정도 손실

—우리나라 금융에 어떤 문제들이 있나?

“다른 나라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희한한 현상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금융에 관한 기본적인 개념에도 너무나 많은 혼란이 있다. 우리 금융제도 안에 내재되어 있는 구조적 문제점들 때문이다.

이런 구조적 문제점들 때문에 국민들이 보는 피해는 최소한 연간 GDP(국내총생산)의 2%, 2022년 기준으로는 43조원 정도 될 것이라고 추정한다. 우리나라 은행 산업이 미국이나 유럽처럼 효율적으로 움직이면 GDP 성장률이 예컨대 3%에서 5%로 올라갈 수 있다는 뜻이다.”

한국경제 성장률의 하향 추세를 억제하기 위해서는 금융산업의 비효율성을 제거하는 금융개혁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어떤 근거에서 그렇게 추론하나?

서 국장이 자신의 책 25쪽을 펼쳐 그래프를 보여주며 말했다.

“2016년말 기준 명목 GDP 대비 전체 가계 부채의 비율과, 명목 GDP 대비 은행에서 받은 가계 대출 비중을 나라별로 비교해봤다. 네덜란드 독일, 오스트리아 등은 거의 대부분의 가계 부채가 은행 대출인 반면, 우리나라 가계 부채 중 은행 대출의 비중은 절반도 안된다. 집안에 돈이 필요할 때 다른 나라 사람들은 거의 모두 은행에서 빌리지만, 우리 국민의 절반 정도는 은행 밖의 고금리 대출로 내몰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고금리 대출에 시달리는 한국인

—어떤 의미를 담고 있나?

“가계 대출이 은행을 넘어 저축은행, 카드론 등으로 가면 대출 금리가 확 상승하지 않나? 보험사, 증권사 등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나라 가계 부채는 저금리의 은행 대출이 절반을 밑도는 수준이고, 그 나머지는 대부분 고금리 대출이다.

우리나라 가계 부채의 GDP 대비 비중도 세계적으로 가장 높은 수준이지만, 그 구성 또한 매우 열악한 실정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저소득층으로 갈수록 빚이 빚을 부르는 현상이 나타날 가능성도 매우 클 것이다.”

—은행의 저금리 대출이 많아지면 가계의 금융비용 부담이 줄어들면서 GDP 성장률이 올라갈 수 있다는 뜻인가?

“우리나라가 유럽처럼 은행 대출이 주류를 차지할 경우 절약할 수 있는 금융비용을 2018년에 추정해 본 적이 있다. 연간 20조~30조원 정도 됐다. 당시 1년 GDP(국내총생산)가 1700조원 정도였으니 1%가 훨씬 넘는 수치이다.”

저소득층 피해가 더 커

—가계의 대출이자 부담이 줄어들 때 그 감소분이 다 GDP로 연결된다고 볼 수는 없지 않나?

“고금리 대출을 쓰는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소득이 낮은 저소득층이다. 이들은 버는 돈의 90% 이상을 소비로 지출한다. 따라서 이들이 이자 지출을 아끼면 그만큼 소비가 늘어나면서 GDP가 증가한다고 봐야 한다.

반면 이 돈이 금융회사로 들어가면 그 돈은 외국인 배당 형태로 해외로 유출되거나, 금융기관 내부 유보 등으로 남게 된다. 곧바로 국내소비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은행의 대출 기능이 부진한 탓에 GDP의 1% 이상이 날라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서 국장이 이 대목에서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등 뒤에 있던 화이트 보드에 ‘금리 절벽’ 그래프를 그리기 시작했다. 시작점을 중심으로 X축은 금융거래자의 신용도가 높은 쪽에서 낮은 쪽으로, Y축은 금융거래자의 예대금리차가 작은 쪽에서 큰 쪽으로 움직였다.

서 국장은 이 좌표 위에 한국의 그래프를 1개, 미국 및 유럽 국가들의 그래프를 1개 그렸다. 미국 및 유럽 국가들의 그래프는 완만하게 우상향하는 곡선인 반면, 한국의 그래프는 미국-유럽의 그래프 윗면에 마치 계단이 한 단 높아지는 형태로 그려졌다. 금융거래자의 신용도가 낮아지는 어느 순간에 금리 부담이 갑작스레 높아지는 그 계단 부분을 서 국장은 금리 절벽이라고 불렀다.

 

서 국장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금리 절벽은 우리 금융산업의 구조적인 치부를 드러내고 있다.”

—무슨 뜻인지?

“이 그래프가 의미하는 것은 두가지이다.

첫째, 우리나라에서는 신용도가 높은 사람조차 미국이나 유럽국가들의 신용도 높은 사람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큰 금융비용 부담을 안고 있다.

둘째, 특히 신용도가 낮은 저소득층의 경우 예대금리차 격차로 인해 부담해야 하는 금융비용이 미국이나 유럽 국가보다 훨씬 커 큰 손해를 보고 있다. 다시 말해 저소득층은 저축은행이나 신용카드 회사 같은 소위 말하는 ‘제2 금융권’에서 비싼 금리로 자금을 조달해야 하는 만큼 그 손해가 클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금리 절벽

—왜 이런 문제가 생기나?

“기본적으로 은행이 턱도 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정부 관료 등 일부에서는 우리나라 은행의 자금공급이 수요 대비 충분하다고 주장하는데, 정말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은행의 자금공급이 충분하면 우리나라 국민의 절반이 고금리 가계대출에 매달리고 있겠는가? 경제학의 세계적인 석학들도 국민의 자금수요 대비 은행의 자금공급이 충분하다느니 그렇지 않느니 따위의 이야기는 함부로 못한다. 그걸 사전에 어떻게 알겠는가?

더욱이 우리나라의 경우 은행들이 과점 체제에 익숙해 경쟁을 소홀히 하고 있기 때문에 자금이 필요한 사람들이 싼 이자로 자금을 충분히 공급받을 수 있는 가능성은 그만큼 낮을 수밖에 없다.”

—개인들의 이자 부담이 커지는 것 외에 다른 문제점은?

“은행들이 과점 체제 덕에 가계 대출만으로도 연간 수십조원씩 이익을 내므로 상대적으로 위험도가 높은 기업 대출은 소홀히 하고 있다. 기업 대출은 금액도 크고 기업의 도산 위험도 있기 때문에 가계 대출에 비해 상대적으로 훨씬 위험하다.

그런데 가계 대출만 해도 연간 수십조원씩 돈을 버는데 굳이 왜 기업 대출을 하겠나? 급할 것이 없으니 기업 대출을 하더라도 안전하게 담보를 잡고 대출해주는 손 쉬운 일만 한다.”

—그러면 정작 돈이 필요한 중소기업과 대기업들이 손을 벌리면 누가 돈을 대출해 주나?

“주식이나 회사채 등 직접금융을 통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대개는 산업은행, 수출입은행, 기업은행 등 정부가 직접 소유하고 지배하는 은행들이 그 역할을 하고 있다. 사실 중소기업들은 직접금융시장에 접근조차 어려운 실정이다.

대기업 대출은 절반 가까이, 중소기업 대출은 30% 정도를 이러한 특수은행들이 담당한다. 민간은행들이 가계 대출에 안주하고 기업 대출을 가급적 회피하다 보니 기업 금융에서 정부가 차지하는 비중이 점점 커져 간다.”

국책 은행의 문제점

—특수은행들의 비중이 커지면 어떤 문제가 생기나?

“민간 비즈니스에 정부의 공적인 개입이 있으면 정치적 명분 등이 득세하면서 효율성이 떨어진다. 어느 경우에나 정부가 시장원리에 의해 이윤을 추구하는 민간에 비해 효율성이 높을 수는 없다.

더군다나 정부가 암묵적으로 지급을 보증하고 있는 만큼 도덕해이(모럴 해저드)가 만연할 우려도 크다. 불과 몇 년 전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의 자본적정성이 크게 떨어져 정부가 세금을 헐어 이들 은행의 건전성을 보강할 수 밖에 없었던 사례는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과거 한진해운 경우와 같이 산업은행 위주로 이루어지는 기업구조조정이 무리하게 추진될 우려도 적지 않다. 결국 국가경제의 전체적인 효율성, 즉 성장잠재력을 떨어뜨리게 될 위험이 크다는 것이다.”

—은행들도 이익을 추구하는 기업인데, 위험을 회피하고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은행들이 과점 이익을 즐기는 바람에 성장성 있는 기업을 발굴하려는 유인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금융산업은 기본적으로 리스크(불확실성)가 있을 수 밖에 없는 산업이다. 은행들이 리스크를 어느 정도 감수하고 성장성 있는 기업을 발굴해야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은행 스스로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함이다. 그렇지만 그 과정에서 결과적으로 국가의 성장잠재력 확충에 기여하게 되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국가경제에도 큰 도움이 된다.

은행들이 지금처럼 가계 대출에 집중하고 기업 대출도 담보 대출 위주로 안전하게만 수행하면 국가의 성장잠재력 확충에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행태는 우리나라의 GDP(국내총생산)를 추가적으로 1% 이상 갉아먹고 있다고 추산한다. 대출 고금리에 따른 직접적인 손실만 GDP의 1% 이상이니, 이러한 효과까지 감안하면 은행 과점으로 인한 전체 손실은 GDP 대비 2% 이상에 이를 것이다.”

은행 과점의 피해자들

왜 이런 문제가 생기는지 다시 한번 질문을 던져 보았다. 서 국장의 말이 이어졌다.

“우리나라 가계 부채 가운데 고금리 부채가 절반을 차지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결국 턱없이 부족한 은행이 국민경제에 필요한 자금 공급을 충분히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 틈새를 파고 들어 고금리로 먹고 사는 업체들이 존속하고 있다.”

—은행을 더 만들면 되지 않나?

“은행이 부족하지만 새로운 은행이 생기지 않고 있다. 일각에서는 은행의 집중도가 높은 것을 거론한다. 소수의 은행들이 전체 은행 대출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은행 수를 늘려봐야 대출 확대에 큰 효과가 없다는 뜻이다.”

—맞는 이야기인가?

“아니다. 은행산업의 집중도가 높다는 것과 은행산업이 과점이라는 것은 완전히 다른 별개의 이야기이다. 은행은 원래 집중도가 높은 산업이다. 미국이나 유럽연합(EU)의 은행 수는 각각 1만개 정도 된다. 그 중에 85~90%는 소형은행이다. 대형은행은 숫자로는 1%도 안된다. 그렇지만 그 대형은행들이 전체 예금과 대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70% 정도이다. 그러니 집중도가 매우 높다.”

금리 절벽 없애는 중소 은행들

—그러면 나머지 30% 정도의 대출 시장을 수많은 중소형 은행들이 조금씩 나눠 갖고 있나?

“그렇다. 중요한 점은 은행산업의 예대금리차를 둘러싸고 수익기회가 있으면 언제든지 새로운 소형은행이 은행산업에 진입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과정에서 은행 간의 인수와 합병도 빈번하게 이뤄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은행 예대금리차가 가장 효율적인 수준으로까지 좁혀지게 되고, 국민경제 전체의 금융비용 부담이 줄어들게 되는 것이다.”

서 국장이 말을 이어갔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상대적으로 대형은행에 비해 자본력과 인력 수준이 떨어지는 소형은행들이 살아남기 위해 주택담보대출 등 소규모 가계 대출로 특화하는 형태를 띠고 있다는 것이다.

몸집이 큰 대형은행이 소규모 가계 대출에서 소형은행과 상대하기는 쉽지 않다. 소형은행은 개별 소비자의 수요에 맞춰 매우 섬세하고 민첩하게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설령 은행산업 집중도가 높다 하더라도 대형은행이 소규모 가계 대출을 취급하면서 가격지배력을 행사해 과점이익을 누릴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은행간 경쟁으로 금리 인하

서 국장이 다시 화이트 보드의 ‘금리 절벽’ 그래프를 가리켰다.

“미국과 유럽 국가들의 가계 예대금리차 그래프가 우상향 방향으로 완만하게 올라가는 이유는 새로운 은행의 신규 진입이 매우 자유롭고 활발한 가운데 조금만 금리 마진(이익)을 볼 수 있으면 수많은 작은 은행들이 끼어들어서 예금 및 대출 금리를 둘러싸고 가격경쟁을 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1990년 이후 30여년 동안 인터넷은행이 생기기 이전까지는 신규 은행 설립이 전혀 없었다. 진입 장벽을 쳐 놓았다.”

은행 허가 기준

—미국이나 유럽의 은행 허가 기준은?

“미국이나 유럽의 은행 진입 규정을 보면 매우 투명하다. 전산 시설, 관리 인력, 최소 자본금 등 기준을 갖추면 누구나 은행업을 할 수 있다. 최소자본금 요건도 매우 낮다. 미국이나 유럽은 은행 설립할 때 최소자본금 기준이 10억~1억원 수준인 경우도 많다.

반면, 우리나라 은행의 최소자본금은 일반은행은 1000억원, 지방은행은 250억원이다. 몇십년째 이 규정이 바뀌지 않고 있다.”

—은행이 동네 구멍가게도 아닌데, 미국과 유럽 국가들이 그렇게 작은 자본금을 가진 은행들도 허가를 해준다는 말인가?

“우리나라는 금융 당국이 은행 허가 때 적합 심사를 한다. 다시 말해 인가 기준이 매우 자의적이다.

그래서 금융계에서는 금융 당국에서 지난 30년 동안 새 은행 허가를 안내줬으니 앞으로도 안내줄 것이라는 부정적인 인식이 팽배하다. 그 바람에 정부가 아니라 민간이 자본주의 원리에 따라 은행을 만든 경우는 전무하다. 이런 식으로 은행의 진입이 틀어막혀 있고 소수 은행의 집중도가 높은 상황에서는 과점 피해가 발생하지 않을 수 없다.”

허가 기준 낮추고 투명해야

—어떻게 해야 하나?

“우리나라에서도 미국이나 유럽처럼 은행업 진입 조건이 투명하고 최소자본금 요건이 완화되면 금리절벽 현상도 사라질 것이다. 치킨집끼리 경쟁하듯이, 중소형 은행들이 지금까지 대형 은행이 집중해온 가계대출 부문에 자연스럽게 끼어 들어 돈을 벌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형 은행은 가계 대출에서 더 이상 과점이익을 누리기 불가능하게 될 것이고, 결국 소형 은행들이 위험하다고 두려워하는 기업 대출 활성화를 통해 수익 기반을 확충해나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대형 은행이 아니라 상호저축은행, 신용협동조합 등이 그러한 소형 은행의 역할을 이미 하고 있지 않나?

“앞에서 우리나라의 경우 금융에 관한 기본 개념에 너무나 많은 혼란이 있다고 말했다. 그중 대표적인 게 무엇이 은행인가 하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우리나라의 상호저축은행이나 신용협동조합 등은 은행이 아니다. 은행이 아닌데다 건전성 등도 취약한 이들 금융기관이 은행과 경쟁한다는 것은 애초 불가능하다. 그냥 은행이 예대금리를 조정하면 그에 맞추어 자기들도 조정할 뿐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대형은행이 예대금리차를 넓혀 수익을 내고자 할 때 반대로 예대금리차를 좁혀 시장점유율을 조금이라도 키우고자 노력하면서 대형은행을 압박하는 등의 모습은 전혀 기대할 수 없다. 결국 미국이나 유럽처럼 대형 은행과 소형 은행 간에 예금 및 대출 금리를 둘러싸고 이뤄지는 경쟁 관계가 상호저축은행 등에 나타날 가능성은 전무하다.”

은행이란 무엇인가?

—왜 그런가?

“은행이 도대체 뭔가를 한번 생각해 보자. 현대적인 의미에서 은행은 규모에 관계 없이 3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은행으로 인정된다.

첫째, 자금이 필요할 때 언제든지 중앙은행에 접근해 가장 저렴한 기준금리에 돈을 빌릴 수 있어야 한다.

둘째, 예금보험공사의 예금보험제도 적용을 받아 예금자를 보호할 수 있어야 한다.

셋째, 은행의 재무상태가 건전한지 판정하는 글로벌 기준인 BIS(국제결제은행) 자기자본비율 규제를 적용받아야 한다.

외형적인 이름이나 규모 등의 형식적인 요소는 하등 중요하지 않다. 은행이든, 상호저축은행이든, 신용협동조합이든 이러한 3가지 법적인 자격 요건을 갖추고 있으면 그 금융기관은 실질적인 의미에서 은행이다.”

—미국이나 유럽 국가에서도 그런가?

“미국이나 유럽 국가에도 신협, 저축은행 등의 이름을 가진 금융기관이 있는데, 이들도 은행이라는 이름을 가진 금융기관과 똑같이 3가지 기준을 의무적으로 충족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영업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일반 국민들이 이들 금융기관을 다르게 생각할 이유가 전혀 없다. 최고 수준의 건전성 규제나 예금자 보호 등을 대형 은행과 똑같이 적용받는데, 단지 규모가 작다고 해서 소형 은행이나 신협, 저축은행 등을 열등한 금융기관으로 볼 이유는 없지 않겠나? 이 때문에 대형 은행과 소형 은행 간의 건전한 경쟁관계도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한국, 미국·유럽과 큰 시각차

—우리나라는?

“은행을 바라보는 시각이 미국이나 유럽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우리나라에서는 은행은 우등한 금융기관으로, 상호저축은행, 신용협동조합, 지역협동조합 등은 고금리 대출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혹은 빈번하게 금융사고나 일으키는 열등한 금융기관으로 인식하는 현상이 팽배하다. 이런 상황에서 상호저축은행 등이 대형은행을 상대로 과점이익을 누리지 못하도록 가격경쟁을 벌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할 수 있겠는가?”

—예를 들어 우리나라의 상호저축은행은 미국이나 유럽의 상호저축은행과 비교해 볼 때 무엇이 다른가?

“우리나라 상호저축은행은 앞에서 언급한 3가지 은행 요건 가운데 예금보험공사의 예금자 보호 조치만 가능하다. 저금리의 중앙은행 자금을 받을 수 없으니 고금리 예금을 내놓게 된다. 예금자 보호 조치는 되기 때문에 돈 있는 사람들이 고금리를 얻기 위해 예금에 가입하는 재테크 창구로 상호저축은행을 활용하고 있다.

상호저축은행 입장에서는 고금리 예금을 받아서 수익을 내야 한다. 그래서 저소득층에 더 높은 금리로 대출을 해주거나 대출 위험이 높은 부동산 개발 사업에 뛰어들게 된다.”

은행 역할 못하는 소형 금융기관

—신용협동조합이나 새마을금고, 지역단위조합은?

“3가지 조건 중 하나도 해당이 안된다. 중앙은행의 지원을 받을 수 없으니 자체적으로 중앙회를 설립해 중앙회가 중앙은행 또는 예금보험공사 역할을 제한적으로 수행한다. 그런데 대외신뢰도 측면에서 중앙회가 중앙은행이나 예금보험공사와 비교가 되나?”

—그런데도 어떻게 잘 버티고 있나?

“정부가 이들 금융기관에 예치하는 예금에 대해 상당한 수준의 세제 혜택을 주고 있는 것이 큰 힘이 되고 있다.”

—그렇게 보면 미국이나 유럽과 상당히 다른 것 같다.

“이러한 금융기관들은 중앙은행과 예금보험공사가 지원하는 일반 은행과 차원이 다르다. 그러다 보니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이름이야 어떻든 모두 실질적인 은행들이 일반 국민들에게 저렴하고 효율적인 금융비용으로 금융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데 반해, 우리나라의 많은 국민들은 은행과는 거리가 먼 열등한 금융기관을 상대해야만 하는 것이다.”

서 국장의 말이 점점 빨라졌다.

“우리나라 고소득층은 은행을 제외하고 다른 금융기관은 거들떠 보지도 않는다. 여유자금이 있을 경우 예금만 금리가 높고 예금자 보호가 되니 상호저축은행으로 간다.

반면 상호저축은행에는 신용도가 떨어지는 사람들이 대출을 받기 위해 들어온다. 연리 15~17% 또는 법정 최고금리인 연 20%에 가까운 고금리 대출을 받게 된다. 저소득층이 대부업체로 넘어가면 금리 수준이 훨씬 높아진다.”

안정성 평가 기준도 낮아

—상호저축은행도 자기자본비율 규제가 있지 않나?

“자기자본비율 기준이 있지만 우리가 만든 기준이다. 글로벌 스탠다드에 맞는 BIS 기준이 아니다. 그냥 열등한 금융기관이니 이 정도 수준만 충족해서 영업하라는 정책적 배려라고나 할까?

예를 들어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전에 은행에 대해서는 자기자본 비율을 BIS 기준에 따라 8% 이상 유지하라고 했다. 그 때 상호저축은행에 대해서는 우리가 자의적으로 정한 기준임에도 그 비율을 2% 정도만 요구했다.”

—해법은?

“이미 여러 차례 이야기했지만, 은행의 진입 규제를 풀어야 한다. 그러면 대형 은행과 소형 은행이 경쟁할 수 있는 여건이 된다. 은행 설립 기준이 투명해지고 예측가능해져야 은행업의 신규 진입이 가능해진다. 그렇게 되면 금리 절벽이 있을 수 없고, 국민들의 부담도 시간이 갈수록 사라지게 될 것이다.

또 소형 은행들이 진입할수록 대형 은행들이 기업 대출로 갈 수 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국가의 경제성장 잠재력이 높아진다. 대형 은행의 일부 업무만 분리해 신규 진입자에게 허가해 주는 것이 아니라, 대형 은행과 동등하게 모든 업무를 취급할 수 있는 허가를 소형의 신규 진입 희망자에게도 내줘야 한다. 그러면 은행들이 알아서 스스로의 전문 영역을 개척해 나가게 될 것이다.”

서정의 한국은행 국장은 자신의 문제 의식과 해결책에 대해 일사천리로 설명했다. 그의 주장의 큰 줄기는 알 수 있었다. 이제 좀 더 체계적이고 구체적인 분야에 대해 질문할 차례이다.

======================================================

금융제도 전문가인 서정의 한국은행 국장은 윤석열 대통령의 언급으로 은행의 과점 문제에 대한 공론화가 시작된 것은 그나마 다행이라고 했다. 그리고 국민들의 고금리 대출 부담을 줄이고 국가의 성장잠재력을 높이려면 은행업 진입 자유화라는 근본적인 처방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가 왜 이런 결론에 도달했는지 독자들이 좀 더 알기 쉽게 한국 금융산업의 문제점과 해법에 대해 더 깊숙한 질문을 해보기로 했다.

—한국 금융산업의 문제점을 몇가지 든다면?

“모두 4가지이다.

첫째, 모든 국민들이 금융거래에서 공평하게 대접을 받아야 하는데, 결과를 보면 제도적으로 차별을 받는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둘째, 국가가 민간 금융기관과 경쟁하는 비중이 너무 높아 국가 전체적인 차원의 비효율성이 커지고 있다.

셋째, 경제학 원론에도 부합하지 않는 금융제도 개편이 진행되면서 오히려 시장 기능을 저해하고 있다.

넷째, 민간 금융기관의 자율성이 과도하게 억제되고 있다.”

하나씩 물어보기로 했다.

금융산업 문제점 ①

:국민 차별

—국민들이 금융거래에서 차별을 받는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한국에서는 금융기관을 ‘제1 금융권’, ‘제2 금융권’ 하는 식으로 분류하는 관행이 있다. 일반 국민들은 마치 우열반처럼 제1 금융권은 우위이고, 제2 금융권은 열등하다고 인식한다. 그리고 많은 국민들이 소위 제2 금융권의 열등한 금융기관으로부터 고금리 대출을 받아야만 하는 상황이 방치되고 있다.

글로벌 스탠더드에서 보면 금융계에 이런 구분 기준은 없다. 은행 신규 설립이 틀어막힌 상황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만 나타나는 희한한 현상일 뿐이다.”

—은행이 제1 금융권, 보험회사 등이 제2 금융권 아닌가?

“교과서에서 정형화된 공식적인 개념이 아니다 보니 사람마다 이야기하는 기준이 다르다. 그래서 혼란스럽고 헷갈린다. 은행을 제외하고 예금이나 대출을 취급하는 곳을 제2 금융권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문제는 이렇게 헷갈리는 용어를 쓰면서 무의식적으로 우등 금융기관과 열등 금융기관을 구별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과 미국·유럽의 차이

—미국이나 유럽은 어떤가?

“미국은 크게 은행, 투자은행, 보험회사로 나눈다. 유럽은 더 단순해 은행과 보험회사로 나눈다. 앞에서 이야기한 3가지 조건을 충족하는 금융기관은 모두 은행으로 구분한다. 그 밖에 수많은 자산운용회사 등이 있지만, 기본적으로 이들은 금융중개 기능을 수행하지 않기 때문에 논외로 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분류와 어떤 실질적 차이가 있는지 잘 이해가 안된다.

“우리는 제1 금융권, 제2 금융권으로 우열반을 나눠서 국민들을 제도적으로 차별하도록 하는 시스템을 만들어 놓았다. 우리나라 은행에 가보면 예금은 모든 사람이 할 수 있지만, 대출은 신용도가 높은 우량 고객만 받을 수 있다.

반면, 미국이나 유럽 국가에서는 신용도가 떨어지는 사람도, 다소간 높은 대출금리를 부담해야 하겠지만, 소형은행 등을 통해 대출을 받는 데 큰 어려움이 없다. 은행의 우량한 대출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우리나라는 은행이 더 이상 만들어지지 않으니, 절반 가까운 국민들이 은행에서 대출 서비스를 받지 못하고 다른 열등한 금융기관으로 밀려나야 한다.”

은행 많아지면 과점 폐해 해결된다

—해법은?

“은행의 설립 기준을 투명하게 만들고 그 기준에 맞으면 허가를 내줘야 한다. 미국이나 유럽은 모두 이렇게 한다. 그래서 은행이 각각 1만개 내외에 달한다. 우리 정부가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결과적으로 절반 가까운 국민들을 열등한 금융기관으로 내모는 상황을 방치해서는 안된다.”

 
한국은 매우 제한된 금융회사에만 은행업 허가를 내주기 때문에 은행이 아닌 금융회사들이 열등한 금융기관으로 취급 받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사진은 금융업 허가권을 쥐고 있는 금융위원회의 정부 세종대로 청사 사무실./조선일보 DB

서 국장이 말을 이어갔다.

“2016년 가계금융복지 조사를 보면 2만여 개 표본 가구 중 대출이 은행 밖에 없다고 답한 비율은 30% 정도에 그치고 있다. 은행과 신용협동기구(새마을금고, 신용협동조합, 지역단위조합)에서만 대출을 받았다고 응답한 가구의 비율 역시 50%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절반 정도는 은행이나 신용협동기구를 제외한 다른 금융기관의 고금리 대출을 받았다는 뜻이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치인들이 선거에서 은행 설립 자유화를 공약으로 내걸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한다.”

재벌의 은행업 진출 우려는?

—은행 설립을 자유화할 경우 기업들이 너도 나도 은행업에 뛰어들어 은행이 재벌의 사금고가 될 수도 있지 않나?

“정부가 30년 이상 신규 은행의 설립을 허가하지 않다가 2015년 11월에 KT에게 케이뱅크, 카카오에게 카카오뱅크의 설립을 허가했다. 정부가 기업에게 은행업을 하도록 허가한 것이다.

정부가 나서서 기업이 은행을 소유하도록 장려하는 나라는 우리나라 밖에 없다. 이 또한 희한한 일이다. 재벌의 은행 사금고화를 우려한다면서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을까?”

 
2015년 11월 임종룡 당시 금융위원장은 금융혁신을 하겠다면서 인터넷 기업들에게 인터넷은행 2곳을 허가했다. 2017년 4월 한 행사에서 강연하는 모습/뉴스1

—산업자본의 은행 진출 금지, 즉 금산분리 원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일부 사람들이 철 지난 금산분리를 철폐하고 기업들이 은행을 하도록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미국은 굳건하게 금산분리를 유지하고 있다. 유럽의 경우 금산분리는 없지만, 이는 유럽의 고유한 특성에 기인한 것이다.”

—어떤 특성인가?

“유럽의 경우 오랫동안 자리 잡은 상업자본주의를 바탕으로 뒤이어 산업자본주의가 형성되었기 때문에 은행이 기업경영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하는 형태로 은행과 기업간의 관계가 발전되어 왔다. 기업이 은행을 소유할 수는 있지만, 한다고 하더라도 유구한 역사를 지니고 경쟁력 높은 기존의 대형 은행들을 상대로 경쟁하면서 수익을 확보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따라서 유럽 기업들은 비즈니스 측면에서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은행을 소유하려는 생각을 아예 하지 않는다. 결국 유럽에서는 제도적인 금산분리는 없지만, 결과적으로 자연스럽게 금산분리가 유지되고 있다.”

은행의 사금고화 막는 방법

—하지만 유럽과 달리 우리나라에는 기업이 은행을 소유할 가능성이 높지 않나?

“은행이 재벌들의 사금고가 되는 사태는 막아야 한다. 그러러면 지금 있는 은행의 소유구조, 즉 기업들의 은행 진입을 제한하는 규정을 그대로 유지하면 된다.

은행의 대주주 요건을 정부가 엄격히 조사하고 심사해 우회 진출을 막아야 한다. 인터넷 은행 사례처럼 이런 금산분리 규정까지 어기면서 기업에 은행을 허용해 주는 것은 원칙에도 맞지 않고 전혀 바람직하지도 않다.”

—기업이 은행을 하면 왜 문제가 되나?

“은행과 기업은 경영을 잘못하면 누구든지 망할 수 있다. 이 둘이 합쳐진 상황에서 망가지면 국가경제에 더 큰 충격이 올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부작용이 많을 수밖에 없는 기업의 은행 소유를 통하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은행산업 내부의 경쟁을 촉진하고 일반 국민의 금융비용 부담을 줄여줄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것이다.”

은행 내부 경쟁 촉진해야

—어떻게?

“미국이나 유럽처럼 소형 은행들이 많이 생겨날 수 있는 제도적 여건만 구축하면 된다. 훨씬 효율적이고 단순한 길이 있는데 굳이 인터넷 기업, 핀테크 기업 등을 끌어들여 금산분리 원칙까지 무너뜨릴 이유가 하나도 없다.”

—그래도 은행의 신규 설립을 자유화하면 규정을 피해 우회 설립하려는 기업들이 생길 수 있지 않나?

“정부가 지금 갖고 있는 금산분리 규제만 유지해도 기업이 은행을 소유할 가능성은 전무하다. 금융감독을 통해서 사후적으로 점검하는 데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기업들이 우회적으로 은행을 소유하는 것이 두려워 은행 설립 자유화를 회피한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국가 경제 전체가 누릴 수 있는 더 큰 혜택을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잘못된 인터넷 은행 허가

—정부의 인터넷 은행 허가에 대해 비판적인 것 같다.

“부정적으로 본다. 왜 인터넷 기업에게만 은행 소유라는 특혜를 주어야 하나? 논리적으로나 다른 나라의 경험 사례를 보더라도 전혀 타당한 일이 아니다. 그냥 금산분리 원칙만 더욱 허물게 될 뿐이다.

미국에 구글 은행이 있나, 아마존 은행이 있나? 만약 진짜로 구글이나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 등이 우리나라에 와서 은행업을 하겠다고 하면 무슨 명분으로 이들을 막을 수 있겠는가?”

인터넷 은행 이야기가 나온 김에 인터넷 은행과 핀테크에 대해 좀 더 깊이 들어가 보기로 했다.

—금융제도 측면에서 봤을 때 인터넷 은행이 큰 혁신인가?

“우리나라에서는 금융혁신인 것처럼 선전했지만, 미국과 유럽에서는 1980년대, 1990년대 이후 이미 많았다. 그런데 잘 안됐다. 일반 은행에 비해 높은 수익성을 보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해 달라.

“처음에는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플랫폼이 생겼으니 점포를 안만들어도 되고 운용인력이 적어도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반면 은행의 재무건전성 규제는 모두 받았다.

그런데 수익성이 낮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높지도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인터넷 전문기업이 은행을 하면 금융혁신이 일어날 것으로 생각해 은행 허가를 내 준 것이다.”

핀테크는 큰 혁신 아니다

—한 때 핀테크(금융+IT)가 각광을 받았는데.

“핀테크를 금융업무에 도입한다고 할 때 어느 한 은행이 그 핀테크를 독점적으로 효율성 있게 쓰기는 어렵다. 핀테크는 모든 은행들이 활용할 수 있는 새로운 플랫폼일 뿐이다. 금융제도 혁신의 차원에서 다뤄질 문제는 아니다.”

—은행의 지급결제 업무를 핀테크 기업에게도 제한적으로 허용할 필요가 있다는 논의가 최근 일부에서 나오고 있다.

“그러한 논의는 문제의 본질을 흐릴 뿐 당면한 은행 과점이익 해소에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다. 지급결제 업무만을 취급하는 특화은행이 생긴다고 해서 이들이 대형은행과 경쟁해 예대금리차를 축소하고 국민의 금융비용 부담을 줄이는데 무슨 역할을 할 수 있겠는가?”

서 국장이 말을 이어 나갔다.

“핀테크가 은행 업무에 정말 필수적이라면 기존 은행, 그리고 새로 생기는 신설 은행 등을 대상으로 일정한 수수료를 받고 서비스를 제공하면 그만이지, 굳이 이들 기업이 은행을 소유해야 할 이유는 하등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도 은행의 지급결제 서비스는 충분히 이뤄지고 있고, 일반 국민들이 이용하는 데 아무런 불편이 없다.

중요한 것은 은행산업 내부의 경쟁환경 조성이다. 아무리 특화은행이라고 하더라도 금산분리 원칙을 추가적으로 허물면서까지 일부 기업의 은행 소유를 부추기는 따위의 일이 중요한 과제는 아니다.”

금융개혁이 실현 안된 이유

서 국장이 은행 설립 자유화라는 해법과 동시에 재벌의 사금고화라는 부작용에 대한 대응책도 설명했다. 그의 해법이 한층 설득력이 있게 느껴졌다. 그런데 갑자기 의문이 생겼다. 금융개혁은 오래된 정책 과제였다. 그런데 왜 그동안 은행 설립 자유화가 실현되지 않았을까? 직사포를 쏘아봤다.

 
금융개혁 논의는 오래전부터 있었으나 은행 과점 체제 해체와 같은 본질적인 개혁 주제는 한 동안 공론화되지 않았다. 사진은 금융위원회가 지난 3월 8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개최한 은행권 경영·영업 관행·제도 개선 실무작업반 제2차 회의./금융위원회

—오랫 동안 금융개혁 논의가 있었는데, 은행 설립 자유화는 왜 아직 실현이 안됐나?

서 국장이 좀 곤란한 듯 잠시 주저하더니 입을 열었다.

“오해가 있는 듯한데, 지난 20여년간 우리나라에서 제대로 된 금융개혁 논의는 사실상 실종상태였다. 어쨌든 질문에 대해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싶다. 우리 금융산업을 설계하고 운영하는데 책임이 있는 사람들은 현행 체제를 유지하고 싶어하는 관행이 강하다. 만약 기존 체제를 허물고 새로운 체제를 도입해야 한다면, 이는 기존 체제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반드시 인정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어떤 금융 관료가 그간 잘못했으니까 그 잘못을 바로 잡기 위해 새로운 체제를 설계하겠다는 의사를 표현할 수 있겠는가?

사실 금융 관료들 입장에서는 이번에 대통령이 말해서 이슈가 되기 전에는 평온한 상태가 유지됐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나라의 수많은 금융기관들을 힘 있는 사람들의 노후보장 수단으로 활용해온 측면도 있다.”

금융 개혁 가로 막는 기득권

—좀 더 자세히 설명하면?

“금융 관료들 가운데 장관과 차관을 지냈던 사람들은 퇴임 후 은행장이나 여타 금융기관장으로 간다. 그 아래 사람들은 단계별로 은행연합회 등 금융기관협회의 전무 등으로, 금융감독을 담당하는 사람들도 퇴임 이후 금융회사의 감사 등으로 간다.”

—퇴임 후 3년간 연관 업종에 재취업할 수 없도록 제한하고 있지 않나?

“아무런 의미가 없다. 로펌 등을 경유하면서 경력을 세탁하면 그만이다. 은행부터 증권회사, 보험회사, 신용카드회사, 상호저축은행 등등 퇴임후 갈 곳이 얼마나 많은가?

직접적으로 표현하기는 참 부끄럽지만, 우리 금융산업에서는 그런 기득권 체인이 여전히 유효하게 유지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역시 정말 다른 나라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우리나라에만 있는 희한한 현상이다.”

—관료나 감독 당국자들만 그런가?

“교수나 관변 연구단체 지식인들 또한 금융기관 사외이사 등을 통해 이러한 체인에 참여하는 경우가 많다. 하나같이 기존 체제를 비판하기보다는 유지 내지 옹호해야 할 유인이 있는 사람들이다. 이 지경에도 금융감독 당국 등은 툭하면 은행 등의 방만한 경영을 질타한다. 참 이율배반이다.”

국회가 나서야

—어떤 비효율이 발생하나?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은행 과점 체제가 유지되면서 수많은 금융소비자들이 은행이나 다른 금융기관과 거래하는 과정에서 지출하지 않아도 되는 비용을 부담하고 있다. 이 비용들이 은행 등 금융기관 직원들의 고액 성과급, 외국인 주주들의 배당 등으로 나가기도 하겠지만, 결과적으로는 돌고 돌아 외부 유입 인사들의 노후대책 자금에도 들어가고 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이런 문제를 개혁하려면 누가 주축이 되어야 하나?

“은행 산업 내부의 경쟁환경을 높이기 위한 논의를 진행하려면 국회가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고 본다. 기존 체제를 유지하고자 하는 경향이 강한 금융 관료들 위주로 논의가 이뤄진다면 그 한계는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금융소비자의 이익과 국민경제의 건전한 발전을 도모한다는 차원에서 사안의 중대성을 감안해 국회가 나서야 한다.”

서 국장은 여기까지 말한 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금융산업 문제점 ②

:국가가 민간과 경쟁

—우리나라 은행산업의 두번째 문제점은?

“국가가 민간 금융기관과 경쟁하고 있는 비중이 지나치게 크다는 점이다.”

—무슨 뜻인가?

“미국이나 유럽은 국가가 세금을 이용해서 어떤 사업을 하고 싶어도 민간이 이미 그 사업을 하고 있으면 잘 들어가지 않는다. 금융업무도 마찬가지이다.

만약 금융기관이 도산위기에 처하면 정부가 세금을 투입해 일시적으로 국유화 할 수는 있다. 그러나 최대한 빨리 출구전략을 써서 그 금융기관을 민영화 시킨 뒤에 빠져 나온다. 정부가 그 은행을 오래 소유하면서 다른 은행과 경쟁하는 것은 금기사항이다.”

—구체적인 사례를 들면?

“주택담보대출을 받기 위해 은행에 가면 은행 직원이 물어본다. 우리 은행의 대출을 받을 것이냐, 아니면 주택금융공사의 보금자리론을 받을 것이냐고. 주택금융공사는 채권을 발행해서 조달한 자금으로 대출을 해 준다. 국가가 개입하는 주택담보대출 상품이 일반 금융기관의 주택담보대출 상품과 직접적으로 경쟁하는 상황이다.”

주택금융공사의 문제점

—최근 주택금융공사가 내놓은 특례보금자리론이 큰 인기라고 한다.

“국민의 금융비용을 절감해준다는 명분하에 이런 식으로 국가가 금융에 개입하는 것은 국민 형평성에도 맞지 않는 일이다. 다 똑같은 납세자인데 국가가 자의적인 기준으로 선심 쓰듯이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혜택을 주는 게 올바르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면 국가는 어떤 일을 해야 하나?

“금융제도 전체의 효율성이 높아질 수 있도록 금융제도를 개편해 시장원리에 따라 은행 등이 경쟁하고, 그에 따라 국민의 금융비용 부담이 줄어들 수 있도록 금융환경을 조성하는 것이다. 국민의 금융비용 부담이 크다고 국가가 직접 나서서 저금리 대출을 하는 것은 하지하책(下之下策)이다.”

—다른 사례를 든다면?

“앞에서도 말했듯이 산업은행, 수출입은행, 기업은행 등 정부가 소유하는 은행이 기업 대출을 둘러싸고 민간 은행과 경쟁하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부분적으로는 중소벤처기업진흥공단도 하나의 예로 들 수 있다.”

—중진공 업무에 어떤 문제가 있나?

“중진공의 가장 중요한 사업이 사실상 대출이다. 연간 4조~5조원의 대출 재원을 굴리고 있다. 지방에 가보면 이 기관이 기업들을 대상으로 대출을 권유하고 다닌다. 벤처캐피탈에도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자금이 많이 들어가고 있다.”

—중소기업, 벤처기업을 진흥하는 것은 정부의 중요한 시책 아닌가?

“국민 세금을 고위험 고수익 재원으로 활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런 일은 민간이 해야 할 일이다. 물론 미국 중소기업청(SBIC)이나 이스라엘 요즈마펀드처럼 벤처캐피탈에 국가가 개입한 사례는 있다. 그러나 이들은 제한된 기간 동안 마중물 역할을 했을 뿐 최대한 빨리 민간 금융기관에게 그 역할을 완전히 이양했다.”

은행 역할 하는 정부

—또 다른 사례가 있다면?

“정부가 대출 형태로 민간 금융기관과 경쟁하는 사례는 굉장히 많다. 저소득층 지원, 자영업자 지원, 중소기업 지원 등등의 명목으로 정부가 저리 대출 사업을 영위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미국 인플레이션방지법(IRA)에서도 나타나는 것처럼 정부는 필요한 경우 세금이나 보조금을 통해 민간 경제활동에 개입하는 것이 원칙이다. 하지만 여러 차례 강조했듯이, 대출은 은행이 하는 것이지, 정부가 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도 정부가 저리 대출을 해주면 받는 사람 입장에서는 상당한 도움이 될 수 있지 않나?

“국민 입장에서는 정부에서 저리 대출을 받으나, 은행에서 대출을 받으나 다 빚이기는 마찬가지이다. 결론적으로 보면 은행 설립을 틀어막아 놓은 상황에서 많은 국민이 막대한 금융비용 부담으로 어려움을 겪다보니, 정부가 거대한 은행 역할까지 맡아야 하는 상황으로 몰리고 있는 셈이다.”

—정부가 은행 역할을 하면 무엇이 문제인가?

“첫째, 미국이나 유럽에서 국가와 민간기관이 경쟁하지 않으려고 하는 이유는 민간이 시장원리를 바탕으로 이윤을 추구해야 당연히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국가가 하면 효율성이 떨어진다는 것이 경제학의 정석이다.

둘째, 민간이 수익을 낼 수 있는 영역에 국가가 들어가서 수익을 낸다는 것은 국가가 민간의 사업 기회를 빼앗는 것이다.”

미국의 주택금융공사

—앞에서 주택금융공사 사례를 들었지만, 미국에도 주택금융공사 같은 기관이 있지 않나?

“미국의 주택금융공사는 우리와 사정이 다르다. 미국은 땅은 넓은데 사람이 적으니 은행의 예금 수취 기반이 약하다. 주택담보대출 수요가 많을 때에는 대출 재원이 부족하다.

그래서 은행들은 주택담보대출을 해 준 뒤에 그 대출 채권을 주택금융공사에 팔아 넘겨 대출 원금을 빨리 회수한다. 그리고 그 자금을 다시 대출 재원으로 쓴다. 이렇게 함으로써 은행의 재무건전성을 보여주는 BIS(국제결제은행) 자기자본비율을 높게 유지할 수 있다. 우리나라도 그래서 주택금융공사를 만들었다.”

—무엇이 문제인가?

“미국과 달리 우리나라와 유럽의 은행들은 인구 밀도가 높아 은행의 예금액이 대출 재원으로 충분하다. 그래서 대출 채권을 주택금융공사에 팔아넘길 이유가 없다. 그러니 주택금융공사가 할 일이 없다.”

—그러면 조직을 잘못 만든 것 아닌가?

“조직을 만들어놨는데 일이 없으니 스스로 일을 만들고 있다. 주택금융공사는 자기가 채권을 발행해 돈을 조달한 뒤에 그 돈으로 은행 창구에서 주택담보대출을 해주라고 위탁하고 있다. 위탁 받은 은행이 대출해준 뒤에 그 대출 채권을 주택금융공사에 넘긴다.

결국 이제는 그냥 주택담보대출 전문기관이다. 은행이 하면 될 일을 주택금융공사가 끼어든 것이다.”

주택연금

—주택금융공사가 운영하고 있는 주택연금은 어떻게 보나?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주택연금 기관으로 활동하고 있다. 미국과 유럽에서 주택을 담보로 잡고 연금을 주는 역모기지론은 매우 일반화된 금융상품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민간 금융기관이 이 상품을 만들면 되는데, 국가가 그 기회를 빼앗은 것이다.”

—그래도 주택금융공사가 은행보다 좋은 주택연금 조건을 제시하면 소비자에게 이익이 되지 않나?

“지금도 사실 은행이 상업적으로 제공할 수 있는 역모기지론보다 훨씬 좋은 조건으로 연금을 주고 있다고 봐야 한다. 주택금융공사 입장에서는 그래야 은행들이 역모기지론 취급을 못하도록 막을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나 만약 집값이 추세적으로 하락하면 어떻게 되겠나? 그 때 가서 또 주택연금 지급을 위해 국민 세금을 헐어야 하지 않겠나?”

은행이 역할 하면 재정 부담도 줄어

—해법은?

“결론은 분명하다. 민간 은행들이 자유롭게 은행 산업에 진입하도록 규제를 풀어 진입 문턱을 낮추어야 한다. 그래야 시장 원리에 따라 은행 간의 경쟁환경이 조성되고 많은 국민이 은행 대출에 접근함으로써 금융비용 부담을 줄여나갈 수 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저소득층, 자영업자, 중소기업 등을 도와주고자 정부가 금융에 개입해야 할 필요성도 줄어들게 될 것이다.”

—은행 중심의 시스템이 잘 작동하면 길게 보면 정부의 재정도 아낄 수 있을 것 같다.

“중장기적인 시각에서 정부의 재정 건전성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려면 시장 원리에 의한 은행 기능을 활성화 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인구고령화가 급속하게 진전되는 상황에서 국민연금, 건강보험, 각종 사회복지 등과 관련해 앞으로 재정지출이 필요한 분야가 얼마나 많겠나? 세금을 늘려도 늘어나는 정부 지출을 감당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은행산업 내부의 경쟁환경이 조성되면 국민의 금융비용 부담이 줄어들게 되고 정부가 세금을 헐어 민간 금융에 개입할 필요도 줄어든다. 그래서 국가 재정 측면에도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금융산업 문제점 ③

:원칙 없는 금융 개혁

—한국 금융산업의 세번째 문제점은?

“금융제도를 개편할 때 최소한 교과서 수준의 원칙은 지켜야 한다.”

—그렇지 않은 사례가 있나?

“신용카드를 예로 들어 보자. 우리나라에는 현대카드, 삼성카드처럼 신용카드 전문회사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미국이나 유럽에는 우리나라 같은 신용카드 전문회사가 거의 없다.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신용카드는 전부 은행이 발급한다. 신용카드 업무는 기본적으로 은행 업무라는 것이다. 비자나 마스터카드를 신용카드 회사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이 회사들은 신용카드 회사가 아니라 신용카드 결제망을 관리하는 회사일 뿐이다.”

서 국장이 말을 이어갔다.

“더구나 우리나라는 여신전문금융업법을 만들어서 많은 수의 신용카드 전문회사나 할부금융 회사들을 모두 대기업 소유로 만들어 줬다. 사실상 예대업무를 제외하고는 많은 은행 업무들이 이미 스몰 라이선스(세분화한 소규모 은행업 인가) 형태로 인가되어 있는 상황이고, 그 와중에 금산분리 원칙도 상당 부분 허물어져 있는 실정이다.”

—어떤 문제가 있나?

“신용카드 전문회사들은 채권을 발행해 대출 자금을 마련한다. 은행 예금보다 자금조달 금리가 높을 수밖에 없다.

업무 범위가 제한되어 있는 상황에서 수익을 높이기 위해서는 신용카드 시장 점유율을 높여야 하기 때문에 각종 할인 제공, 무이자 할부혜택 제공 등으로 많은 비용이 지출되어야 한다. 그러니 카드론으로 대출을 해줄 때 고금리를 받을 수 밖에 없다.”

—카드론을 주로 누가 쓰나?

“고금리 카드론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저소득층이 대부분이다. 결국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들의 무이자 할부 구매 소비, 각종 할인 혜택을 위해 저소득층으로부터 고금리 이자를 받는 셈이다.”

선진국은 카드대출 대신 은행대출

—미국이나 유럽의 상황은?

“미국은 상황이 조금 다르지만, 유럽의 경우 많은 국가들이 은행에 대해 카드론 업무를 아예 취급하지 못하도록 규제하는 경우도 많다. 그만큼 은행 대출을 통해 저렴한 자금이 풍부하게 공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대안은?

“신용카드에 대해서도 결론은 동일하다. 애초 신용카드 업무를 은행만이 취급하도록 유지했다면 가장 좋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200년대 초반에 겪었던 신용카드 대란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미 많은 카드회사들이 허가를 받아 영업을 하고 있지 않나?.

“이들을 시장에서 강제로 퇴출시킬 수도 없는 일이다. 역시 중요한 것은 신규 은행의 진입을 자유화하여 많은 국민들이 저렴한 금융비용의 은행 대출을 이용할 수 있도록 금융환경을 조성하는 길뿐이다. 그렇게 되면 시간을 두고 많은 국민들이 신용카드 전문회사의 고금리 카드론에 의존해야 할 필요성이 자연스럽게 줄어들게 될 것이다.”

제로페이의 단견

서 국장이 이 대목에서 서울시에서 시행한 ‘제로페이’ 제도에 대해 말을 꺼냈다.

“제로페이 제도는 신용카드 회사가 자영업자에게서 받는 카드 수수료가 높으니 서울시가 개입해서 수수료를 아예 없애는 것이다.

한마디로 촌극이다. 세상 어느 나라에서 중앙정부 또는 지방정부가 신용카드 수수료가 높다고 세금을 헐어 별도의 결제망을 구축하고 민간 금융기관과 경쟁하는 사례를 찾아 볼 수 있을까?”

—서울시도 고민을 많이 하지 않았겠나?

“자영업자들의 고충이 크다 보니 고육지책으로 도입한 정책이겠지만, 애초에 성과를 기대하기는 힘들고 아까운 세금만 낭비할 가능성이 높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설령 성과가 있어서 제로페이가 활성화된다고 하더라도 일반 국민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왜?

“생각해 보라. 신용카드 수수료 수입이 줄어들 경우 신용카드 회사들이 어디서 그 수익 감소분을 벌충할까? 당연히 카드론 대출금리를 높일 것이다. 돌고 돌아 국민의 전체적인 부담은 전혀 줄지 않는다는 뜻이다.”

규모와 범위의 경제

—시사점은?

“신용카드 회사 사례의 문제점은 우리나라가 금융제도를 개편할 때 교과서 수준의 원칙을 제대로 지키지 않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교과서에서는 금융기관의 업무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금융기관들이 ‘규모의 경제’, 그리고 ‘범위의 경제’를 누릴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배려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무슨 뜻인가?

“‘규모의 경제’라는 것은 기업의 덩치가 커질수록 생산단위당 평균비용이 줄어들게 됨을 의미한다. ‘범위의 경제’라는 것은 취급할 수 있는 업무의 범위를 넓힘으로써 기업의 수익 기반을 확충할 수 있다는 뜻이다.”

—'범위의 경제'를 은행에 적용하면 어떻게 되나?

“은행에서는 은행 직원 한 사람이 대출도 해주고 신용카드 업무도 처리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은행은 별도 회사를 설립하는 데 들어가야 하는 비용과 운용 인건비를 줄일 수 있다. 수익이 늘어나게 됨은 당연하다.”

—소비자가 받는 혜택은?

“은행이 조달금리가 낮은 예금을 신용카드 대출 재원으로 활용하기 때문에 훨씬 저렴한 비용(금리)으로 신용카드 대출을 이용할 수 있다. 국가 전체적으로도 금융효율성을 크게 높일 수 있다. 미국이나 많은 유럽 국가들이 은행만 신용카드를 발행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카드회사 허가해 금융비용만 상승

—우리나라는?

“신용카드 전문회사를 별도로 도입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캐피탈이라든지, 여타 여신전문 금융회사로 분류되는 금융기관들도 모두 마찬가지이다.

은행이 모든 업무를 취급할 수 있고, 또 그래야 국가 전체적으로도 금융효율성이 높아질 수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은행 업무단위를 쪼개고 쪼개서 별도의 금융기관들만 무수히 만들어 대기업들이 이들을 소유하도록 만들었다. 정부가 나서서 금융기관의 효율성을 떨어뜨리고, 결과적으로 국민들의 금융비용 부담만 가중시키고 있는 셈이다.”

서 국장이 말을 이었다.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이러한 사례를 찾아볼 수 없다. 이들 나라에서는 이러한 업무들을 당연히 은행의 업무로 인식하고 있다. 따라서 모든 은행이 이들 업무를 직접 취급할 수 있다.

일각에서는 우리나라 은행의 이자수익 비중이 미국이나 유럽에 비해 지나치게 높다는 점을 들어 은행이 이자장사에 치우치고 있다고 비난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온당치 않다. 사실상 우리나라 은행이 취급할 수 있는 업무가 예대업무밖에 없는데, 이자이익 비중이 높게 나타나는 것은 당연하다.”

금융지주회사의 눈속임

—금융지주 회사들을 보면 금융지주 아래에 은행, 보험, 카드, 캐피탈 등을 모두 갖고 있다. 이것도 ‘범위의 경제’ 혹은 금융겸업화라고 볼 수 있나?

“전혀 아니다. 사실 금융겸업화에 대한 개념도 혼란스럽긴 마찬가지이다. 금융겸업화는 원래 하나의 금융기관이 은행업과 증권업을 동시에 수행해야 할 것인가 아닌가에 관한 문제이다.”

—미국은?

“금융지주회사를 통해 은행과 증권회사(투자은행)가 서로 범위의 경제를 누릴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그나마도 글래스-스티걸법이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공식적으로 폐기된 이후에나 이뤄졌다. 그 전에는 대공황 이후 은행업과 증권업이 엄격하게 분리되어 운영됐다.”

—유럽은?

“은행이 직접 증권 업무를 취급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이른바 유니버설 뱅크(universal bank)이다. 우리나라 은행과 유럽 은행들이 단지 이름이 같다는 이유만으로 같은 은행으로 보는 것은 큰 오산이다. 유럽 은행들이 취급하는 업무 범위는 우리나라 은행이 취급하는 업무 범위보다 훨씬 넓다.”

—한국은?

“미국의 금융지주회사 틀만 벤치마킹 했을 뿐 사실상 은행의 금융겸업화를 전혀 지원하지 않고 있다. 신용카드 업무, 캐피탈 업무 등등 원래 은행의 업무까지 쪼개어 별도의 전문회사를 만들도록 하고 있는 판에 은행업과 증권업의 겸영 등을 통한 시너지 효과 창출 등에 대해서는 이야기도 꺼내기 어렵다.

단지 금융지주회사 안에 여러 금융기관들을 자회사로 편입시켰다고 해서 문슨 효과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한 사람이 여러 업무를 동시에 하면서 효율성을 높이는 것이 금융겸업화의 목적인데, 한 지붕 아래라 하더라도 어차피 독립적인 여러 금융기관들이 별도로 영업을 추진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어떻게 효율성이 높아지겠나? 인건비 절약 등을 통한 비용절감조치를 기대하기 어렵다. 그로 인해 파생되는 비용은 결국 일반 국민들에게 전가될 뿐이다.”

한국 금융산업의 4가지 문제점 중 3가지에 대한 대화가 끝났다. 4번째 문제점에 대한 질문이 이어졌다.

======================================================

금융제도 전문가인 서정의 한국은행 국장과의 대화는 한국 금융산업이 안고 있는 4가지 문제점을 주제로 삼아 계속 이어졌다. 앞에 3가지 문제점에 대해 깊이 있는 답변을 들었다. 4번째 문제점에 대해 질문을 했다.

금융산업 문제점 ④

:지나친 금융 규제

—한국 금융산업의 네번째 문제점은?

“민간 금융기관의 자율성이 지나치게 억제되고 있다. 민간 금융기관의 자율성은 국가 차원에서 소중하게 생각해야 한다. 민간의 자율성은 국가 성장잠재력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민간의 자율성이 강화되는 방향으로 진행되는 금융개혁이 시급하다.”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해 달라.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금융의 기본 개념이 너무 혼란스럽다. 그 중 가장 혼란이 극심한 사례는 아마도 금융감독과 관련한 개념일 것이다.

금융제도는 금융시장, 금융기관, 금융규제로 이뤄져 있다. 그런데 금융규제는 금융감독과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

금융규제 vs 금융감독

—어떻게 다른가?

“구체적으로 말하면 금융규제란 국가 내에서 이뤄지는 일체의 금융활동을 제어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뤄지는 모든 법률적 제도적 장치를 의미한다. 중앙은행의 통화정책 또한 이러한 법률적 틀 내에서 이뤄지기 때문에 당연히 금융규제의 일환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면 금융감독은 뭔가?

“금융규제를 다시 세분해 보면 통화정책과 금융감독으로 나눌 수 있다. 중앙은행은 통화정책을 수행하면서 금융제도의 한 축인 금융시장의 안정을 도모해야 할 책임을 진다. 반면 금융감독 당국은 주어진 법률적 테두리 안에서 또 다른 금융제도의 축인 금융기관의 경영건전성을 안정적으로 유지해야 할 책임을 진다.”

관치 금융

—문제가 뭔가?

“우리나라에서는 금융감독을 금융규제와 같은 의미로, 때로는 금융규제보다 더 넓은 개념으로 해석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 일상적으로 벌어지고 있다. 심지어는 중앙은행을 제껴두고 금융시장 안정까지도 금융감독의 책임인 것처럼 금융감독 당국이 행동하고 있고, 많은 사람들이 이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다 보니 중앙은행 통화정책의 유효성에 심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안들까지도 금융감독 당국이 마구 벌이고 있다.”

—예를 들면?

“은행의 예대금리 설정에 직접 개입하는가 하면, 예대금리차 공시를 무슨 중요한 정책인양 추진하고 있다. 이 또한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절대로 찾아볼 수 없는 우리나라에만 있는 희한한 현상이다. 민간 금융기관의 자율성은 온데간데 없다. 금융감독은 금융규제의 법률적 테두리 안에서 이뤄져야 함에도 이러한 행태는 오히려 그 테두리까지 벗어나고 있다.”

LTV와 DTI

—독자들이 이해하기 쉬운 사례를 들어달라.

“은행 대출과 관련해 LTV(주택담보대출비율), DTI(총부채상환비율) 등을 금융감독 당국의 규제 수단으로 쓰는 나라는 우리나라 밖에 없다.”

—외국에도 이런 제도가 있지 않나?

“있긴 하지만, 그 비율을 은행이 자율적으로 결정하지 정부가 일률적으로 정하지는 않는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나라에서 가계부채가 사회적 이슈가 되니 금융감독 당국이 이 기준을 금융감독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다.”

외국에서는 LTV, DTI, DSR 같은 부동산 대출 기준을 은행들이 자율적으로 결정하지만, 한국에서는 금융감독 당국이 규제 수단으로 남발하면서 금융회사들의 자율성이 침해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정책 수단으로 사용할 때 무슨 문제가 있나?

“이 비율을 정부가 통제 수단으로 사용했을 때 원하는 성과를 거둔다는 학술적인 연구 결과는 사실상 찾아보기 어렵다. 이들을 통제 수단으로 쓰려고 한다면 최소한 이들 비율을 한 단위 조정했을 때 가계부채가 어느 정도 늘어나거나 줄어든다는 정도의 경험적 학술적 증거는 뒷받침되어야 할 것 아닌가? 그냥 이렇게 하면 가계부채도 잡히고 집값도 잘 통제되겠지 하는 선입견을 갖고 시행하고 있을 뿐이다.”

—바람직하지 않다는 말인가?

“절대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이는 마치 그 효과가 전혀 검증되지 않은 약을 환자에게 마구 처방하는 꼴이다. 지난 정부 때 LTV, DTI 등을 중심으로 얼마나 많은 부동산 대책을 내놓았나? 그래서 집값이 잡혔나? 오히려 새 정부 들어 한은이 금리를 올리니 집값이 잡히지 않았나?”

BIS 자기자본비율

—그래도 은행들의 지나친 대출 경쟁을 막는데 효과가 있지 않을까?

“금융감독의 기본은 금융기관의 경영건전성을 유지하는 것이다. 은행을 대상으로 미국이나 유럽의 금융감독 당국이 공통적으로 적용하는 기준은 오로지 BIS 자기자본비율 규제이다. 은행의 자기자본이 대출 같은 위험가중자산의 일정 비율 이상 유지하도록 해, 예컨대 대출 원리금 상환이 연체되거나 부도가 나더라도 은행이 망하지 않도록 하는 장치다.”

—어느 정도 효과가 있나?

“BIS 자기자본비율 규제는 은행의 건전성을 유도함에 있어 참으로 세련되고 효과적인 수단이다. 은행의 위험한 자산운용 행태를 자기자본비율을 통해 간접적으로 제어함과 동시에 그 테두리 내에서 은행의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하고 있다. BIS 자기자본비율 규제의 유효성에 대해서는 미국이나 유럽에서 일관되게 인정하고 있다.”

—미국과 유럽은?

“미국과 유럽에서는 은행들이 BIS 자기자본비율 기준을 지키는 범위 안에서 업무를 추진할 경우 어떠한 업무를 취급하건 금융감독 당국이 이에 일체 개입하지 않는다. 개입할 권한도 없고 이유도 없다. 그 뿐이다.”

—은행들의 대출 경쟁이 과도해도 그냥 돠둔단 말인가?

“사전적으로 은행 대출이 과다하게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판단하는 것도 쉽지 않지만, 만약 은행의 대출 경쟁이 진짜로 과다하게 이루어져 금융시장이 과열된다면 이는 금융시장 안정 차원에서 중앙은행이 나서야 할 문제이지, 금융감독 당국이 나설 문제는 아니다. 금융시장 안정에 있어서는 중앙은행의 통화정책이 훨씬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금융감독 당국이 통화정책의 유효성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행태를 보이는 사례는 있을 수 없다.”

부동산 대출 과열경쟁 막으려면

—저금리 때 은행들이 대출경쟁을 벌이면서 부동산 투기를 부추기는 문제는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금융시장 안정은 통화정책을 담당하는 중앙은행의 임무이다. 경기 과열은 중앙은행이 통화정책을 통해 해결해야지, 금융감독 당국이 부동산 대출을 규제해서 해결할 문제는 아니다.”

서 국장이 말을 이어 갔다.

“여러 번 강조했지만, 금융감독 당국이 민간은행의 대출을 과목별로 통제하는 것은 그 자체로 은행의 자율성을 직접적으로 억제하는 것이다. BIS 자기자본비율 규제를 통해 간접적으로 은행의 위험한 자산운용 행태나 지나친 대출경쟁을 제어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이처럼 은행의 자율성을 그냥 억제하는 것은 절대로 바람직할 수 없다. 미국이나 유럽에서 은행 부동산 대출을 LTV 등을 활용해 규제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미국과 유럽에서 그런 사례를 전혀 보지 못했나?

“있기는 하다. 예를 들어 스웨덴의 경우에는 은행으로 하여금 10년인가 하는 정도의 오랜 기간에 걸쳐 LTV 비율을 100%에서 95%로 낮추도록 권고한 적이 있다. 그 정도 수준이다. 우리와는 큰 차이가 있다.”

—부작용이 크지 않다면 외국 금융감독 당국이 사용하지 않는 정책도 우리가 쓸 수 있는 것 아닌가?

“미국이나 유럽에서 LTV, DTI 등을 은행 통제 수단으로 사용하지 않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 은행의 자율성이 억제되고, 그로 인해 국가 금융자원이 비효율적으로 배분되는 상황을 간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경영난 은행은 파산시켜야

—부작용의 예를 들면?.

“은행이야 금융감독 당국이 담보 주택 가격의 40%~60% 내에서만 대출을 해주도록 통제하니 부동산 가격이 하락해도 별 문제가 없다. 부동산 가격이 아무리 떨어져도 절반 이하로 하락하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정부에서 하라고 하니 그냥 숨죽이고 따르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대출 이자를 받아 연간 수십조원씩 이익을 내며 직원들 성과급을 주면 된다. 은행이 자율성을 포기하고 복지부동 하는 대가로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그만큼 국가의 성장잠재력이 침식될 수 있음을 정말로 유념해야 한다.”

—만약 은행이 영업을 잘못해서 BIS 자기자본비율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면?

“청산을 해야 한다. 청산할 때 국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크면 일단 국유화 시킨 뒤에 최대한 빨리 매각해 민영화 해야 한다.

금융기관의 업무는 원래 위험을 떠안고 하는 사업이다. 위험을 하나도 떠안지 않고 누워서 떡먹는 장사를 한다는 게 말이 되나?”

노무현의 금융개혁 시도

이야기의 주제가 정부의 금융개혁 작업으로 이어졌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3년에 한국을 동북아 금융허브로 만들겠다는 전략을 추진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왜 안됐다고 보나?

“금융산업의 실상을 잘 모르고 정치적 동기에서 추진했기 때문에 성과가 없었다고 본다. 한 때 한국판 골드만삭스를 만들겠다는 주장도 있었다. 그런데 그게 되겠나?”

—왜?

“미국과 유럽의 금융회사들은 한국에 관심이 없다. 그들은 자율적인 영업에 익숙한 사람들이다. 한국에 들어와서 은행업을 하려면 다른 업무는 모두 다른 금융기관에 넘기고 예금과 대출 업무만 해야 한다. 더구나 감독 당국이 LTV(주택담보대출비율) 지켜라, DTI(총부채상환비율) 지켜라 하면서 규제를 하고 있는데 은행 영업을 하려고 하겠나?

그동안 들어왔던 외국계 금융기관들이 한국에 와서 적응을 못하고 많이 나갔다. 그들이 한국의 누구에게 적응을 못했겠나? 금융소비자겠나? 금융감독 당국이겠나? 외국 은행이 한국에 올 유인이 없는데 한국이 동북아 금융허브가 될 수 있을까?”

한국의 은행들, 수익성 낮다?

—한국의 은행들이 과점으로 큰 이익을 내고 있다고 하지만, 미국 은행에 비해 수익성이 많이 떨어진다는 주장도 있다.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은행의 수익률은 한 단위의 자산이 얼마나 이익을 냈는가 하는 기준, 즉 ROA(자산기준수익률)를 기준으로 많이 따진다. 이 기준으로 보면 미국, 캐나다, 호주 등의 은행은 우리나라 은행들보다 수익성이 높다. 이에 반해 유럽 국가들이나 일본 은행들의 수익률은 우리나라 은행들보다 낮다.

그러나 이런 지표만으로 우리나라 은행의 수익성이 미국 은행들보다 뒤떨어진다고 보는 것은 곤란한다. 특히 이를 근거로 우리나라 은행들이 과점 이익을 누리는게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더더욱 곤란하다.”

—미국 은행들의 수익률이 높은 이유는?

“앞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미국 은행들은 인구 밀도가 낮아 대출 재원으로 쓰는 예금이 부족하기 때문에 대출 채권을 수시로 팔아 받은 돈을 다시 대출해 주는 방식을 쓴다. 보유 채권을 팔면 자산이 줄어들기 때문에 분모가 작아지면서 이익률이 높게 나타난다.

반면 우리나라와 유럽의 은행은 인구 밀도가 높아 예금이 그리 부족하지 않다. 그래서 대출 채권도 장기 보유하기 때문에 자산 규모가 커서 ROA 기준 이익률이 낮게 나타난다.”

—다른 나라들은?

“캐나다나 호주 등 미국과 유사하게 인구밀도가 낮은 국가들의 경우에도 이러한 이유로 ROA가 높게 나온다. 즉 대출채권 유동화 과정에 의해 ROA 기준 수익률이 크게 영향을 받는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채 단순히 결과로 나타나는 ROA만을 가지고 우리나라 은행들의 수익성이 미국 은행들보다 낮다느니 또는 우리나라 은행들이 과점 이익을 크게 누리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식으로 판단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정부의 개혁방안 미흡

시계가 오후 6시 30분을 향해 간다. 오랫 동안 한국 금융산업 전반에 대한 이야기가 오고 갔다. 서 국장은 30년 이상 한국 금융제도를 연구해온 전문가답게 자신의 주장이 명확했고, 피부에 와닿는 사례를 많이 들어가며 쉽게 설명했다. 독자들이 접하기 어려운 시각, 정부의 홍보와는 다른 견해도 많았다. 한국 금융의 후진성과 그에 따른 국민과 국가의 피해에 대한 문제의식, 그리고 새로운 선진금융시스템에 대한 열망에 그는 4시간이 넘도록 지치지 않고 자신의 견해를 논리적으로 설명했다.

이제 인터뷰를 마무리지을 시간이다. 어려운 내용의 인터뷰가 장시간 계속됐기에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서 국장이 대화 중간중간에 언급했던 주장과 해결책들을 요약정리하는 질문들을 마지막에 하기로 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은행 개혁을 언급한 이후 정부가 내놓고 있는 개혁 방향을 평가하면?

“전혀 만족스럽지 않다. 금융개혁의 접근 시각과 문제점 해결 측면에서 원칙을 지키지 못하고 있다. 또 논의되고 있는 해결책이 근본적이지 못하고 지엽말단적인 것이 많다.”

개혁의 출발은 은행

—어떻게 해야 하나?

“한국 금융시스템의 구조적인 문제 때문에 국민들이 금융비용을 많이 부담하고 있고 국가경쟁력 강화도 제약을 받고 있다. 이러한 금융시스템의 혁신은 최고의 금융기관인 은행의 정체성을 재정립하는 데에서 출발해야 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은행의 진입을 시장의 관점에서 자율적으로 허용해, 대형 은행과 소형 은행이 동등하게 경쟁하게 할 수 있는 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이다. 우리나라 은행 산업을 미국이나 유럽처럼 가꾸어 나가면 국민의 절반 정도가 차별받는 금융 환경이 없어질 것이다.

많은 국민이 제도적으로 차별받고 있는 상황을 국가가 방치해서는 안된다. 이는 국가의 성장잠재력을 키운다는 측면에서도 매우 중요하다.”

—그렇다면 보험사, 카드회사, 상호저축은행 등 기존 금융기관 뿐 아니라 신규 진입을 원하는 참가자들이 모두 은행이 될 수 있는 길을 열어줘야 한다는 뜻인가?

“보험사는 별개 문제다. 그렇지만 기본적으로 예금과 대출 업무를 취급하는 금융기관에 대해서는 투명한 은행 설립 요건을 바탕으로 금산분리 원칙에 부합하는 한 은행으로의 전환을 적극 장려해야 한다. 신규 진입을 원하는 참가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은행·보험·증권으로 재편

—기업이 소유한 금융 회사들이 모두 은행이 되면 고객의 예금을 부실한 자기 회사의 부도를 막는데 동원할 수도 있지 않은가?

“은행이 되려면 은행법 규정에 맞게 기업 대주주들이 지분을 정리해야 한다.”

—금융개혁이 완성되면 한국의 금융산업은 어떻게 분류될까?

“미국처럼 은행, 증권회사, 보험사로 크게 3분 된다고 볼 수 있다. 미국은 서부개척 시대에 철도가 건설되면서 대규모 자금이 필요했으나 당시 은행의 대출여력이 높지 않았다. 그래서 자금을 대부분 회사채를 발행해 조달한 까닭에 투자은행(증권회사)이 발전했다. 미국에서는 대공황 이후 은행과 투자은행을 분리시켰다.

반면 유럽에는 증권회사가 없이 은행과 보험 2개 업종이 주류를 이룬다. 땅이 좁고 인구밀도가 높으니 은행 예금이 충분하고, 그래서 은행 대출이 회사채 발행보다 간편하기 때문이다. 기업들이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회사채를 발행하기 보다는 은행 대출을 이용하는 경우가 더 많다.”

금융개혁의 모델

—한국의 금융개혁이 지향해야 할 모델이 있다면?

“현실적으로 우리나라는 유럽과 매우 비슷하다. 땅은 좁은데 인구밀도가 높다. 유럽에서 참고할 만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유럽과 우리는 분명히 다른 점이 있다. 유럽은 자본주의 발생지이고 상업자본주의가 꽃을 피웠다. 이런 환경에서 은행이 300~400년 동안 기업과 관계를 정립하면서 주도적인 역할을 해왔다.”

—유럽에서 산업자본과 금융자본 간의 관계는 어떤가?

“유럽에서는 은행이 기업 경영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하는 것이 일반적이고, 기업이 은행을 소유하는 사례는 별로 없다. 그래서 금산분리, 즉 산업자본의 금융자본 지배를 억제하려는 논의도 없다. 필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문제는 미국의 사례를 참고하는 것이 좋다.”

—그래도 유럽에서 기업이 은행을 운영하는 사례를 하나 든다면?

“독일의 자동차 회사인 폭스바겐이 설립한 폭스바겐은행이 있다. 은행감독 당국의 규제를 다른 은행과 똑같이 받고, 모든 은행 업무를 할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자동차 할부금융만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이 업무를 캐피탈 회사들이 하는 반면, 독일은 작은 은행이 하고 있는 것이다. 은행 허가를 자유화하고 은행이 다양한 업무를 취급할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배려하면 이렇게 유럽의 소형 은행들처럼 우리나라 은행들도 스스로 알아서 살아갈 영역을 찾아가게 될 것이다.”

한국은행의 임무

—금융개혁에서 한국은행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나?

“금융시장, 금융기관 등을 둘러싼 금융제도의 기본틀은 중앙은행과 뗄래야 뗄 수 없다. 그 자체가 통화정책의 파급경로이기 때문에 중앙은행의 통화정책과 연결된다.

중앙은행이 금융제도, 그 중에서도 은행산업에 관심이 없을 수는 없다. 금융시장을 중심으로 금융안정의 막중한 책임을 지고 있는 중앙은행이 이를 방관해서도 안될 것이다. 앞으로 은행산업 개편 논의가 본격화될 경우에 대비해 내부적으로 검토도 있을 것이고, 때가 되면 중앙은행으로서의 공식 입장을 분명하게 표명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독자들은 한국은행의 금리 정책에 관심이 많을 듯해 서 국장에게 질문을 몇가지 던져 보려고 했다. 그러나 인터뷰의 메인 주제와 결이 많이 다르다며 그가 다음을 기약했다.

======================================================

흥로운 주제라서 잠시 담아 둡니다.

Posted by SMHK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