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범일동

기타/옛날에 2016. 11. 2. 18:59

국민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 서울로 이사를 왔다고 어머님께 들었습니다. 기록으로도 그렇게 되어 있고요. 한동안 제 기억으로는 아이들 앞에서 간다고 이야기 했던 기억이 있어 학기 중인 줄 알았었는데 아닌가 봅니다. 또 서울에 간 다음 아이들 앞에서 전학생 신고도 했던 것 같은데 말입니다. 어쩌면 방학식 때 제가 방학중에 전학 간다고 미리 인사를 시켰는지도 모르겠고, 서울에 도착해서는 신학기 대 새로온 아이라고 소개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근 50년이 되어 가는 기억이라 불분명합니다. 기억의 단편들이 얼마 남지도 않았지요.


그 몇 가지를 풀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동네 아이들하고 큰길에서 다방구 놀이를 했던 기억입니다. 큰길인데, 어렸을 때의 큰길이니까 별로 큰 게 아닐 수도 있었겠지만 어머니께서도 그게 50미터 계획도로였다고 말씀하셨으니 맞을 것 같습니다. 길이 만들다 말은 건지 아니면 일부만 확보된 것인지 아무튼 차가 안 다니는 길치고는 엄청나게 넓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 때야 전등이란 게 적었던 시기니까 어두워지면 자동해산입니다.


(이 글을 메모장에 기록한 다음 작은 누니을 만나 이야기 하다가 이 도로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더니 다른 말씀을 하시네요. 아무래도 저보단 나이가 더 많았을 때까지 살았기 때문에 누님 말씀이 옳겠지만 혹시 다른 도로-이미 도로로 쓰이고 있던 도로-를 말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다음은 우리 집이 개천 옆에 위치했었다는 것이지요. 울타리 사이로 내다보면 개천이 보였고, 위에 말했던 큰길이 아닌 다른 길을 따라가다 다리가 하나 있는데 그 다리 위에서 봐도 되었습니다. (이게 누님이 말한 길이 아닐까 하고 혼자 생각해 봅니다.) 그 땐 직하식 변소가 전부였고, 다들 한푼이라도 아낀다고 비가 오면 열심히 개천으로 퍼내 버리던 시기였습니다. 그래도 아이인 우리가 근처에 접근하지 못하게 막으셨던 기억이 나네요. 아무튼 비가 오고 나면 그 개천에 똥이 한가득 떠내려 왔습니다.


4부두에서 그렇게 멀지는 않았던 모양입니다. 어린 마음에 왜 4부두가 가깝고, 1부두는 먼지 이해가 안되었습니다. 숫자는 1부터 시작한다는 것만 알았던 시기여서 그랬겠지요. 어른들이야 위치 때문이라고 이해하겠지만 어린애에게는 무리였습니다. 아직도 그 기억이 나기 때문에 때로는 아이들이나 미경험자들(이 엉뚱한 소리를 하는 것)을 이해하는 데 이 추억을 활용합니다. 어느 날 부두에 놀러갔더니 트럭 하나가 물에 처박혀 있더군요. 아이들이 접근할 수 있던 곳들에는 경사로 된 곳이 꽤 있었는데 거기에 옆으로 서 있다가 뒤집혀 빠진 모양입니다.


어묵(당시엔 오뎅이라고 했었습니다.)을 자전거 행상이 갖고 다니면서 팔았던 것도 생각납니다. 그 때 먹었던 어묵의 맛이 요즘 것보다 좋았던 것 같습니다. 따뜻한 상태에서 먹어서 그랬을까요? 절반은 우리 입으로 들어가고 나머지 절반이 반찬으로 활용되었던 것 같습니다. 자주 먹었던 게 아니라는 건 확실합니다.


할아버지께서 어느 날 등장하셔서 몇 년간 같이 살다가 돌아가셨습니다. 저랑 겸상을 한 경우가 잦았는데, 저는 그게 좀 불편했던 것 같습니다. 돌아가셨을 때가 아직 미취학 때였나 봅니다. 어느 날 갑자기 부모님이 베로 된 걸 머리에 쓰고 쌔끼줄로 매고는 우는 것만 기억 납니다. 할아버지가 인생에서 사라진 것을 당시에는 깨달았는지 모르겠지만 큰 영향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다쳐서 누군가의 등에 업혀 병원으로 실려간 기억도 납니다. 울고 있었던 영상만 기억이 나는데, 아픈 기억은 전해지지 않네요. 아마도 의사가 꿰메려고 접근했던 것 같은 장면이 어슴프레 보입니다만 그게 진짜인지는 불확실합니다. 아직도 이마와 코에 흉터가 남아 있습니다. 깡통 뚜껑을 갖고 놀다가 엎어져서 베인 거라고 합니다. 어머니가 기독교이고 할아버지는 무교(유교라고 할 수 있었겠죠, 아마?)이신데 제사를 지낸다고 해서 시아버지와 며느리가 대립했었나 봅니다. 뭐, 시아버지를 이길 수 없는 시기이니 제사상을 차려 드렸는데 바로 그 직후 제가 크게 다치는 바람에 제사를 다시는 지내지 않게 되었다고 합니다.


없는 살림에 사립이었던 성남국민학교에 보냈다는 말도 나중에 들었습니다. 어쩐지 학교가 나중에 경험한 서울의 학교(이문국민학교)랑 비교하면 고급이었었지요. 수업시간에 도서실에 간 기억도 납니다. 책 크기와 비슷한 나무판을 책 대신 꽂아 두고 책을 빼서 보았습니다. 잠시 경험하는 거였을 테니까 금세 반납해야 했던 것 같네요. (하지만 인터넷 정보엔 공립으로 나오고, 누님도 공립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어디서 사립이란 잘못된 정보가 저에게 주입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아, 우리 집에 세 들어 살던 (아니면 반대로 우리가 세 들어 살았던) 사람이 닭을 하나 키웠던 기억도 있습니다. 닭장이 개천 쪽에 있었는데 아마도 청소의 편리성 때문이었겠지요. 가끔 밖에 풀어놓으면 바로 옆의 장독대에 날아올라가기도 하더군요. 매일은 아니지만 달걀을 자주 낳았습니다. 그 집 딸이 달걀을 낳으면 달려가서 꺼내오던 것도 생각 나네요. 그냥 놔두면 깨뜨리는 경우가 잦다면서 즉시 빼야 한다고 하는 말도 했었습니다.


닭 하니까 생각 나는 건 어느 날 지렁이를 하나 발견해서 삽에 얹어 닭에게 줬는데 얼마 후 가 보니 지렁이가 닭의 부리를 칭칭 감고 있어서 삼키지도 못하고 쩔쩔매는 듯한 걸 보고는 놀라 도망 갔습니다. 어린 마음에 책임 추궁이 무서웠던 모양입니다.


마당에 있는 살아 있는 닭은 그 뒤 한참 시간이 지나서 70년대 후반에 서울 묵동에서 보았네요. 잡아 먹는다고 사온 것인데 며칠을 굶었는지 석회 성분이 없는 달걀을 다음날 아침에 낳았더군요. 물론 그날 죽임을 당하고 백숙이 되었을 겁니다.


어머님 말씀대로라면 69년 여름에 서울로 이사를 한 모양입니다. 범일동에 이사를 간 건 65-6년 경이라니까 벌써 50년 전 이야기네요. 얼마 전 다음 등의 지도를 보니까 그 지역은 재개발 된 모양입니다. 어딘지 짐작도 할 수 없었습니다.


용두산 공원에 두어 번 놀러 갔다는 것도 추가되겠는데, 끝없이 오르는 것 같은 계단하고, 어두운 밤풍경만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아이들에겐 어른의 시각과 다른 기억이 남더군요. 우리 애들도 여러 곳에 데리고 다녔는데 나중에 사진을 보여주면 제가 여기 갔었어요?가 고작입니다. 아직 어린 애들은 신경 쓰지 않고 부모가 놀러 가고 싶은 데를 가다가 학교 다닐 때부터는 신경을 조금 쓰면 될 것 같습니다. 또한 금세 자기들 마음대로 살고 싶어하는 시기가 되기 때문에 어른이 신경 써 줘야 하는 시기는 매우 짧은 것 같습니다.


교회는 좌천동 교회에 다녔던 모양입니다. 아직도 그 이름이 기억나는 걸 보면. 지금 검색되는 교회가 그 교회인지는 모르겠고요.


언젠가 버스를 타고 간 교회가 있습니다. 교회에 간 게 아니라 어머니 아는 사람이 결혼을 그 교회에서 한 모양입니다. 그래서 어머니 따라간 듯한데, 답례품을 하나 챙겼던 것 같습니다. 기도하고 눈을 떠 보니 없어졌습니다. 어디 갔느냐고 물었더니 어른(아마도 어머니)은 없어져서 아쉬운 모양이라고 생각해서 당신 것을 주셨는데, 저는 아쉬운 게 아니라 어디로 사라졌는지 그 자체가 궁금했습니다. 먼 훗날 누군가가 훔쳐간 것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 때인지 다른 때인지 버스를 타고 가다가 거리의 가게 유리창에 비친 버스 번호를 기억했다가 나중에 말씀 드렸더니 잠시 당황하시더군요. 그러다가 12번이 아니라 21번 아니냐? 고 되물으셨습니다. 겨우 숫자를 알아보았지만 거울에 비치면 하나가 아니라 전체의 좌우가 바뀌는 것까진 몰랐던 어린아이의 경험입니다.

Posted by SMH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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