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에 다가가는 남자로서 별로 안되는 게 사실입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거의 없습니다.


먹는 것에 대한 생각을 해보니 고등학교 때까지는 집에서 밥 먹고, 도시락 싸가서 먹고 했으니 전적으로 어머니에게 의지했던 시절이었습니다.

대학에 간 다음에는 도시락을 싸가기도 하고 때로는 구내 식당에서 사먹기도 했었는데, 대학이 이전한 다음에는 구내식당 비율이 훨씬 높아졌습니다(99.9%).

인턴 시절에는 집에 가야 집밥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366일 중 대략 300일은 병원 밥을 먹었네요.

레지던트 시절에는 일년 중 절반 정도는 병원에서 나머지 절반은 집에서 저녁하고 다음날 아침만 먹었던 것 같습니다.

군대에 가니 당연히 구내식당이죠.

군 2년차 때 서울에 있는 병원급으로 이동하게 되어 출퇴근하게 되었습니다. 점심은 구내 식당 내지 근처 식당.

군 제대 후에는 대체로 점심만 구내식당에서 먹게 되었고 결혼도 얼마 후에 해서 어머니 비중은 점차 줄고 아내 비중이 커졌습니다.


제주도에 내려온 직후 아내가 모 기관에 취직하면서 직무교육을 두 달이나 받아야 한다고 하여 다시 서울로 올라갔습니다. 큰애는 학교에 다니니 저랑 같이 있고, 다른 애들은 데리고 올라갔죠. 그래서 처음으로 식사라는 걸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첫 끼니는 김치 볶음밥. 몇 번은 사 먹은 바가 있지만 제가 하는 건 처음입니다. 제가 만든 것은 시중에서 사먹었던 것이나 어머니나 아내와는 다른 재료와 맛입니다. 제 생각엔 제가 만든 게 제일 낫더군요. ㅎㅎ 아무튼 그 이후로 우리 집에서 볶음밥은 제가 하는 것으로 정해졌습니다.


다음 끼니는 만두국. 큰애가 만두국은 먹지 않았었는데, 그날 이후 먹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요즘도 제가 하느냐면 그건 아닙니다.


그리고 큰누님이 내려오셨습니다. 부녀만 있는 걸 못마땅해 하신 어머니의 지시였습니다. 그래서 본격적인 살림살이는 시작만 하고 끝나버렸습니다.


시간이 지나서 누님은 가시고 아내는 왔습니다. 제가 하는 말이 자랑으로 들렸었는지 당신도 요리해!라는 말만 들었죠. 하라고 하면 안하는 게 인간입니다. 기분이 내키면 냉장고에 있는 재료로 뭔가를 만들기도 하는데, 저의 기본 원칙은 <30분 이내에 끝낼 수 있는 것만 한다.>입니다. 뭐, 하다 보면 한 시간도 걸릴 수 있겠습니다만.


볶음밥.

부대찌개.

김밥.

돼지고기 볶음.

에그 스크램블.

국수.

김치볶음.

프렌치 토스트.


이 정도가 그나마 명맥을 이어가는 것들입니다.


국수는 통 안 먹던 것인데, 제가 검색해서 삶았더니 면발이 아주 좋더군요. 몇 번은 더 했지만 여전했고요. 그래서 아이들에게도 전수했습니다. 골뱅이를 넣기도 하고, 잔치국수를 만들기도 하고(이 때에는 아내가 면을 제외한 나머지 작업을 합니다.), 김치를 썰고, 버무린 다음 무쳐서 넣기도 합니다.


돼지고기도 비슷해서 동일한 방법이 아니라 생각나는 대로나 재료가 되는 대로 만듭니다. 김치를 넣기도 하고, 양파와 고추장만 넣기도 하고. 아내는 일정하게 만드는데 저는 되는 대로 만듭니다. 하나가 없어서 포기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프렌치 토스트는 그게 프렌치 토스튼지 모르고 시작한 것입니다. 어느 날 식빵이 딱딱하더군요. 그래서 식빵을 구워서 계란 후라이랑 먹는 것보다는 계란을 풀어서 씌우면 나을 것 같아 만들었습니다. 그랬더니 그게 그거라고 말해주더군요. 이름이 뭐면 어떻습니까, 내 입에 맞으면 그만이지.


부대찌개는 제주도에 잘하는 집이 없어서 (진짜로 없는 건 아닐지도 모르지만 내가 모르면 사실상 없는 것입니다.) 아, 우리가 한번 만들어 먹어볼까 하고 시작했습니다. 옛날에 먹던 걸 기억해서 대충 구색 맞추어 넣고 끓여 먹는 것이지요. 호평을 받아 요즘도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해 먹습니다.


김밥은 가끔 애들 소풍 때 많이 사서 일부는 싸서 보내고 나머진 먹었는데 재료를 선택할 권리가 별로 없죠. 품목을 선택하면 재료는 세트로 들어갑니다. 그래서 어느 날 우리가 싸서 먹어보자고 시작했습니다. 보통은 주말에(아이들까지 다 있는 날을 고르다 보면 어쩔 수 없습니다.) 아내가 재료를 준비하고, 제가 맙니다. 들어가는 재료는 집에서 하는 것이라 일정하지 않지요. 대체로 단무지, 졸인 우엉, 오이, 볶은 당근, 햄, 게맛살, 계란지단이 기본이고, 시금치나 김치가 들어가기도 합니다. 깜박 잊으면 빠지는 것이지요. 김치는 잘라서 넣거나 이것저것으로 버무려서 넣기도 하는데, 아내가 준비를 잘 안해 주기 때문에 제가 준비하기 전에는 안 들어갑니다. 다 하면 썰어서 먹기도 하고, 아이들이랑 저는 한 줄씩 잡고 먹기도 합니다. 먹는 재미가 다르니까요.


김치볶음은 매번 다르게 만들어집니다. 기분이랑 재료가 다르니 성과도 다른 것입니다. 김치는 아내의 친정에서 보내온 것, 우리가 담은 것, 우리가 산 것 등이 다르고, 첨가물은 식용유만 넣고 하기도 하고, 돼지고기를 넣기도 하고, 찌개가 되기도 하고요.


쓰다가 생각해 보니 중간의 목록은 제가 주장해서 우리 집에 추가된 것들이네요. 음, 고스란히 내 몫으로 할당된 게 전부 내가 추가한 것이라면 이는 아내의 음모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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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MH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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