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농중학교

기타/옛날에 2016. 12. 13. 11:49

1974년, 이문국민학교를 졸업한 다음 배정된 곳은 전농중학교였습니다. 당시 동대문구에 (남자) 중학교가 몇 안되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기껏해야 청량중, 전농중, 경휘중, 대광중 정도인가요? (남자) 고등학교는 더 적어서 경휘고, 대광고밖에 없었던 것 같네요. 하나 더 있었던 것 같은데 영 기억이 안 납니다. 없었나 봅니다. 그런데 당시 동대문구 인구가 백만 명이었습니다. 상당한 지역이 67년인가에 서울로 새로 편입된 지역이라 주민의 다수는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이고 젊었으니 학생들도 많았지요.

이문동에서 전농동이면 상당히 먼 거리입니다. 일단 근처에 가서 길을 묻다 보니 주변의 주민들은 농대병설중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당시엔 산업대였던 것으로 아는데 훗날 시립대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시립대 약사를 보니 18년 경성농업학교로 시작한 것을 50년에 농업초급대학으로 재설립한 다음, 56년 서울농업대학, 74년에 서울산업대학, 81년에 서울시립대학, 87년엔 서울시립대학교로 변경하였군요.)

아무튼 찾아 가니 3개의 학교가 나란히 있었습니다. 해성여중이 좀더 길쪽(서쪽)에 있고, 더 들어가면 전농여자중이 왼쪽에, 전농중학교가 오른쪽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이문동 쪽에서 가는 차는 대체로 시조사 다음 정거장(이름을 기억 못하겠네요. 아마도 산업대 입구 정거장 정도였겠죠.)에서 내려 산업대 입구인 언덕을 지나 전농로터리까지 걸어가야 했습니다. 로터리 조금 못 미쳐서 예각으로 꺽어지는 길이 있는데 이를 따라 가면 해성여중이 나오고 그 입구 근처에서 오른쪽 골목으로 들어가서 다시 왼쪽으로 꺽으면 전농중학교들이 나오는 것이죠.

조금 전 <다음 지도>를 펼치니 여전히 시립대쪽에서 빨리 가는 길은 없습니다. <전곡초등학교>는 언제 생겼는지 모르지만(허걱! 1959년 개교라고 나오네요. 왜 기억이 안 나지요? 매일 그 앞을 지났을 텐데.) 그 북쪽으로 길이 난다면 시립대 쪽에서 전농중학교 쪽으로 가는 길이 300미터 이상 단축될 것입니다.

아무튼 가니 직사각형은 아니지만 넓직한 운동장과 11자 형태로 배열된 두 건물만 있었습니다. 당시 교감 선생님이 열심히 테니스장(클레이 코트)을 만들던 기억이 나는데 (가끔 주변을 지나던 학생들이 끌려가서 시멘트를 채운 쇠 롤러를 밀어야 했었죠.) 아직도 그대로 있습니다.

해성여중은 2010년 해성여고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전농여중은 전일중학교로 이름이 바뀐 것으로 보아 남녀공학이 된 듯하네요. 헛! 74년에 개교한 것으로 나오네요. 제가 전농중학교에 입학하던 때니 원래 전농중학교를 만들 때 여중도 만들 계획이었을까요, 아니면 땅을 분할해서 후에 만든 것일까요? 그리고 2001년에 전일중학교로 개명했군요. 아무튼 전농여중은 전농중에 비해 지대가 3미터 정도 낮았습니다. 우리 학교에서 바라보면 아래에 있는 것이지요.

거기에 대해 당시에 설이 두어 가지 있었는데, 가장 많이 돌은 것은 <전농중 학생들이 여중으로 월담하는 걸 막기 위해서이다>였습니다. 물론 넘어갈 수는 있는데 되돌아 오는 건 힘이 들기에 월담을 못할 것이라는 주장인데, 실제로 몇이 갔다가 돌아오는 걸 보기도 했지만 나란히 이웃한 학교치고는 왕래가 지극히 불편했으므로 그 목적이라면 성공한 셈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농대의 밭(논이라고 들은 것도 같네요.)을 메워서 만든 것이라 단차가 생겼다고.

다시 돌아가서, 전농중학교는 1967년에 농대병설중학교로 인가를 받아 68년 3월 청량중학교에서 더부살이를 하다 8월에 현 자리로 이전해 왔다고 되어 있습니다. 제가 74년에 갔으니 6년된 건물이었나 봅니다. 그다지 낡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으니 맞겠네요.

건물이 동서로 뻗어 있기 때문에 남쪽이 창이고 북쪽은 복도인데 남쪽 창에는 좀 특이하게 베란다가 있었습니다. 엄청나게 크고 무거운 창문을 밀어서 열고 창문턱을 넘어 나가면 베란다가 있어서 창문을 닦다가 추락할 염려는 없었습니다. 대신 물컹한 진흙 같기도 한 이상한 것으로 창을 문에 고정하기 때문에 (몇 달이 지나야 딱딱해짐.) 유리를 갈은 다음에는 오랫동안 닦을 때 힘이 들었습니다. 게다가 어떤 유리는 아무리 닦아도 깨끗해지지 않더군요.

3학년 때인가 미화부 차장으로 임명되어서 (아, 하기 싫었는데 억지로 시켜서 했습니다. 아무도 안하려고 해서.) 청소를 감독하는 게 주된 일이었는데, 더럽지만 그게 최선이기 때문에 참으로 곤란했던 기억이 납니다. 누가 보아도 더럽지만 누구 해도 더 이상 깨끗하게 만들 수 없다는 것 이해하실 수 있겠습니까? 처음엔 더럽다고 체크했다가 억울한 그 학생의 강력한 항의를 받은 다음 제가 닦아 보니 안되더군요. 그래서 깨끗하다고 체크했더니 이번엔 선생님들(담임 및 미화 평가 담당)이 지적을 하시는 데 참으로 난감했습니다. 속사정을 알면 이해할 수 있겠으나 모르면 객관적인 평가에선 지적을 할 수밖에 없지요. 이런 일이 인간 세상에선 비일비재한 것이라서 단순하게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남을 비난하는 것은 잘못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 땐 각 학년이 15반이었습니다. 대략 65명 정도가 있었으니 근 천 명이나 되는군요. 3천 명이라. 지금 (2016년 11월 22일) 들여다 본 전농중학교의 현황은 남학생 288명에 여학생 247명, 계 535명이네요.

교가는 그대로입니다.

배봉산 치솟는 태양을 받아 빛나는 눈동자 여기 모여서

보람찬 배움길 안표를 삼아 창조의 가르침 배우는 우리

이 기상 우리의 마음 슬기 모아 전농중학교

이 기상 우리의 마음 영원하라 전농중학교


배봉산은 학교 옆쪽 그러니까 동쪽에 있는 산입니다. 대부분 깍여 나간 듯하네요. 운동장은 여전히 다각형이군요. 아마도 남쪽으로 축구장이 마련하려고 하다 보니 그리 된 듯한데 40년이 지났어도 변하지 않았네요. 전일중은 인조잔디인 모양인데 여긴 맨땅. 헛! 휘경여자고등학교가 배봉산을 끼고 붙어 있군요. 전혀 동떨어진 지역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럴 수가! 누님이 휘경여고 1회시거든요.

그 땐 지도를 본다는 생각을 안하고 살던 시대라 이런 줄 몰랐습니다. 봤더라도 이동수단이 버스 아니면 도보였던 시대고 생활반경을 벗어나는 게 두렵던 (어린) 시절이었으니까 가 볼 엄두도 못 냈겠지요.

3년간 버스에서 내려 20-25분 정도 걸어서 매일 등하교를 하다 보니 졸업하게 되었습니다. 그 땐 공부 잘하지만 가난한 아이들은 공고나 상고로 갔습니다. 그리고 공부 못하는 아이들도. 고등학교에 가려면 시험을 보아야 했는데 200점 만점(체력장 20점?)이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100점대인 아이들은 인문고를 못 가고 밀려서 상고나 공고로 진학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성적 상위층과 하위층은 실업계 고등학교에 그리고 상위층과 중위층은 인문계 고등학교에 갔습니다. 인문계 고등학교는 대학교 진학이 최종 목표이니 당연한 진로들이었지요.

아, 시립대 고개 이야기가 나오니 통일교 생각이 나네요. 어느 날 등교하고 있는데 통일교에서 안내문을 나눠주고 있었습니다. 당시엔 거절하면 우르르 몰려와서 해꼬지를 한다는 소문이 흉흉하게 돌던 때라 겁이 좀 났던 기억이 있습니다. 실제로 그런 일을 당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는 몇 번 들은 바 있습니다. 진짜인지 아닌지는 모르지요.

현대 자동차의 포니도 비슷한 시기에 나왔기 때문에 화제였습니다. 어느 날 시립대 쪽으로 걸어가고 있는데 친구가 '야, 저 차 포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전 당시엔 자동차 같은 것엔 문외한이여서 봐도 구별 못하는 상태였기에 무슨 소린가 했고요. (일명 자동차맹)

바로 밑의 여동생은 국민학교 고학년 때부터 제가 고등학교 2학년이 될 때까지 저보다 키가 더 컸습니다. 아마도 지금은 171인가 될 겁니다. 제가 175니까 조금 큰 편이죠. 그래서 키 작은 게 일종의 컴플렉스였는데, 중1 때 19번인가 그랬고, 중2 때는 28번, 3학년 때는 36번 정도로 커졌습니다. (셋 다 키순으로 번호를 정하는 담임을 만났습니다.)

당시엔 돈이 드는 준비물을 챙겨오는 학생이 별로 없었던 시절입니다. 60여 명의 학생 중 절반이 챙겨 오면 양호한 편이고, 어떤 준비물(함석으로 쓰레받이 만드는 것이 10명 정도, 동판으로 에칭 기법 알아본다고 할 때엔 딱 3명만 가져왔습니다)은 가져온 사람을 헤아리는 게 훨씬 빠릅니다.

2학년 때인가 체육 시간에 소프트볼을 하게 되었는데 타자는 어디에 서야 하는지 몰라서 난감했던 기억이 납니다. 아는 애들이 앞으로 가라고 하는데, 그 앞이 나의 앞인지(옆으로 서 있으니까요) 투수 쪽인지 몰라서 헤맸습니다. 이럴 땐 적당히 스윙 아웃 당해주면 차례가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어차피 방망이도 무거워서(당시엔 체력이 매우 약했습니다. 지금도 중하위권이겠지만 당시엔 하하나 하중 정도일까요?) 제대로 휘두를 수 없었고요.

대표적인 놀이는 <세 발 뛰기>라는 명칭의 놀입니다. 줄을 그어 각 영역을 만들고 세 번 안에 돌아오지 않으면 죽는 것인데 남을 밟고 가면 영역으로 인정하니 줄줄이 늘어서서 멀리 갈 수 있습니다. 상대를 영역 밖으로 밀어내거나 쓰러뜨리면 아웃 당하니 줄어들죠. 운동장이 넓어서 잔뜩 나와서 해도 부족한 느낌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요즘도 비슷한 걸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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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MH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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