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는 선배라고 하면 참으로 아득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요즘도 대학 신입생 환영회(또는 MT)에서 못된 선배들의 잔학성이 드러나기도 하는데 옛날에 좀더 심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저는 어쩌다 보니 성인이면 누구나 다 일단은 존중해야 한다는 사고를 갖고 성인이 되었습니다. 선배뿐만 아니라 후배도요. 둘 사이의 관계는 둘이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입학 후배랑 기묘한 관계가 형성되기도 합니다. 김은 저에게 존댓말을 씁니다. 제가 선배라는 이유로. 사실 김은 재수생이니 저랑 동갑이겠죠. 박은 김의 후배인데 저랑 평어로 대화합니다. 박이랑 김은 고교 선후배이니 셋이 모이면 이상한 대화가 이루어집니다.
너: 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김: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박아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박: 저는 저렇게 생각합니다, 김 선배님. 그런데 누구야(저입니다), 이 주제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니?
가위바위보 게임도 아닌데 이리 이상해지는 건 두 사람 간의 관계를 각각 별도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동창회 명부를 새로 만들면 꼭 전화가 걸려옵니다. 특히 사기범들이 먼저 전화를 하지요. 나 몇 회인 선배인데(한 때 MBC 부장이 단골 메뉴였습니다.) 잘 있었나?
아니, 자기가 선배면 다인가요? 얼굴 한 번 본 적이 없는 사람이 이름도 밝히지 않는 선배라고 주장하면서 다짜고짜 반말을 하면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아 그러십니까 하고 대답하겠습니까? 결정적으로 우리 고등학교는 과거(그러니까 평준화 이전)엔 야간 고등학교였기 때문에 공부 좀 하던 사람이 갈 만한 자리엔 있는 게 거의 불가능합니다. 다른 글에서 잠시 소개했었던 선배들처럼 지방에서 올라와 전입한 경우가 아니라면 (그들은 정규반 외에 별도의 대학 진학반을 편성해서 방학 때까지 특별 수업을 했다고 하시더군요.) 개인적인 출세는 가능하더라도 조직사회에서의 출세는 좀 힘듭니다.
뭐 진짜 선배일 수도 있겠죠. 하지만 전 다짜고짜 윗사람인 걸 내세우는 사람은 싫습니다. 저의 대답은 뻔합니다.
"다시는 전화하지 마세요."
전화가 다시 오지 않았으니 제 목적은 달성되었습니다.
나이가 많으면 인생의 선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직장에서 근무하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종종 나이와 직책이 역전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나이로 일하는 게 아니라 직위로 일을 하는 것이지요. 나이가 많은 후배에겐 보통 선배도 존칭을 써줍니다. 그렇다고 후배가 반발을 하는 건 용납이 안되지요. 후배잖아요. 그러니 피차 존칭을 쓰는 게 관례입니다. 후배가 선배에게 반말을 한다면? 즉시 이후로는 대부분의 (나이 어린) 선배들에게 반말을 들을 걸 각오해야죠. 앞선 직장의 경우도 대체로는 상사가 나이 많은 부하들에게 존댓말을 쓰기도 합니다. 아닌 경우도 있겠지요.
선배는 후배보다 먼저 그 분야(인생이든 학교든 직장이든 모임이든)에 들어온 사람입니다. 선배를 존중하는 이유는 선험적인 지식(그리고 지혜)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니 존중받고 싶다면, 후배에게 지식(지혜)를 나눠줘야 합니다. 그게 아니라면, 즉, 선배입네 하면서 지시만 하고, 억지로 뭘 시키기만 한다면, 선배로서의 자질을 상실한 것입니다. 후배에게 봉변을 당해도 할말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 기능을 하고 있는 선배가 봉변을 당한다면, 구제책을 마련해야겠지요.
저는 요즘 여러 분야에서 선배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기 때문에 조용히 침잠하려고 합니다만, 주변인들은 조금 견해가 다른지 제가 처박혀 있는 걸 못마땅해 합니다.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근심걱정이 많다더니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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